목록Taiji Yoga/9.0 기운 공부: 氣 (Cultivation of Gi) (52)
谷神不死
도(道)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言語道斷)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설명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나는 존재합니다. 道가 무엇인지는 말하는 순간 틀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바로 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은 학인(學人)에게 마음을 내어놓으라든지, 고함을 친다든지, 들고 있던 몽둥이로 내려친다든지 하는 비상식적인 짓을 하는 겁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道를 말하라 해서는 안됩니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선도(仙道)를 하는 사람들은 道와 씨름하는 대신에 기(氣)를 공부합니다. 이기(理氣)는..
그는 "바로 이겁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누구인가? 깨달음이 무엇인가? 부처가 온 까닭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말이다. 그것에 대해 가장 마땅한 대답이 "이겁니다"라고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이겁니다" 할 때, 거기서 생각은 끊어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에너지, 즉 氣뿐이다. 고함을 치거나, 몽둥이찜질, 그리고 "無" 字나 "須彌山", "뜰 앞에 잣나무", "똥 막대기", "삼서근", "東山水上行"을 부를 때처럼 말이다. 성리학(性理學)은 "이(理)가 일어나면 기(氣)는 그 뒤를 따른다(理發氣隨). 그리고 氣가 일어나면 理는 그 위에 올라탄다(氣發理乘)"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이기일원(理氣一元,) 즉 '理와 氣의 양자(兩者)가 같다(同)'는 말로 끝맺는다. 방하..
예수는 요한이 베푸는 요단강 침례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확인했고, 싯다르타는 생로병사(生老病死)로 고민 끝에 결국은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나란 것은 없다(無我)"를 깨달았다 하며, 최재우, 강일순, 문선명은 자신이 하느님이란 걸 스스로 깨달았다고 전합니다. 난 내가 하느님인지, 하느님 아들인지에는 관심이 없지만, 50년 공부로 깨닫게 된 것은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며, "의식과 氣"만이 변치 않는 "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깨닫고 싶습니까? 하느님보다는 하느님 아들임을 깨닫는 것이 좋겠지요. 재벌보다는 재벌 아들이 더 모양 날 것이니까요. 하지만 33살에 참혹하게 피살당하는 것은 피하고 싶군요. "나는 없다"라는 말엔 할 말이 없군요. 자기가 없다는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하겠습..
작용(作用)은 에너지(氣)의 발현(發現)입니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부족하거나 부조(不調)를 이루고 있으면 원만한 作用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깨달음(見處)을 얻었으면 작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作用은 에너지에 힘입어 일어납니다. 깨달음이 있어도 作用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지요. 깨달음 후에는 필히 에너지 공부를 추천합니다. 기철학(氣哲學) 등등.. 말로만 하는 에너지 공부는 소용이 없습니다. 몸을 알고, 숨을 알고,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통기(通氣)와 축기(蓄氣), 운기(運氣)를 힘써 행(行)해야 합니다. 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말했습니다. 上士聞道勤而行之 (지혜로운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한다)
세상을 모두 얻었어도, 내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지만, 남겨진 그 이름이 죽은 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죽은 정승보다 산 개가 낫다 하지 않던가요? 억만금과 명예를 두고 죽든,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을 지니고 죽든, 죽음은 매일반 아닐까요? 명성(名聲)도 지나가고, 깨달음도 지나갑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든 간에, 세상에 목숨보다 귀(貴)한 것은 없습니다.
氣는 몸과 마음의 상위(上位)이다. 氣가 어떤 상태이냐, 즉 기분(氣分)의 상태에 따라 우리의 건강 상태는 좌우된다. 氣가 막히거나 부족하면 몸은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지며, 우리의 마음 역시 氣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氣를 알고 운영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어려움(苦)에서 벗어나고, 氣에 대한 파악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넘어 상락아정(常樂我淨)에 이른다. 氣는 道와 하나다. 氣를 안다는 것은 깨달음의 시작이며, 氣는 우리를 神性에 이르게 하는 통로이다.
우리는 호흡을 통하여 자연 에너지를, 그리고 식물(食物)을 통하여 물질 에너지를 거두어들여 살아갑니다. 하지만 물질 에너지는 가급적 적게 사용할수록 좋습니다. 과다한 소비는 그 과정에서 불순물 생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연 에너지와 물질 에너지의 적절한 balance(調和)가 필요합니다. 불순물을 정화시켜 우리를 청정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단전(丹田)이 맡아하며 순수한 에너지일수록 자연(神)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仙道에서 단전호흡을 중히 여기는 것은 그러한 원리에 근거합니다.
"흙 바른 벽도 氣가 떠나면 무너지느니라." 甑山선생의 말씀입니다. 저절로 되는 듯싶어도 세상은 에너지가 받쳐줘야 움직입니다. 눈만 뜨면 "깨달음"을 외치던 道人(?)도 기운이 진(盡)해지니 헛소리하고 바지에 오줌 지립디다. 몇억 한다는 고급 승용차도 배터리 방전되면 꼼짝도 못 합니다. 氣가 없는 理는 "理"가 아니듯, 氣가 빠진 "깨달음"도 깨달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떠들어대도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理(性)의 자리(本性)는 텅 비어 있고, 고요하다고 표현되고 있으나(空寂靈知), 사실은 에너지(氣)로 가득 차 있으며, 소리란 소리는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의 작용은 한이 없습니다. 그것에 氣가 작용을 시작하면, 알아채는 기능에 더해 전지(全知)뿐 아니라 전능(全能)해집니다. 그것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조건만 충족되면 만물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모든 권능이 그의 손에 있습니다. 理와 氣의 이치를 깨우치고, 그 작용의 메커니즘(mechanism)이 파악되는 순간, 세상 모든 것들을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人間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주막에 도착해 자기 허기(虛飢)만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말에게도 넉넉히 먹이를 줍니다. 자기만 밥을 먹고 말을 굶기면, 말이 움직이지 못해 부득이 여정(旅程)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이(理)이며, 말은 기(氣)입니다. 소식(消息)을 들었던 수행자들의 대부분이 낙오(落伍)하고 마는 것은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아서입니다. 여행길에 말을 버리고 갈 수 없듯, 理氣는 一元입니다(氣發理乘). 한 소식을 했으면 그다음부터는 필히 氣 공부에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무난히 공부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