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9.0 기운 공부: 氣 (Cultivation of Gi) (52)
谷神不死
아는 사람은 그저 알 뿐, 믿지 않습니다. 오직 모르는 사람만 믿으며 종속되어 삽니다. 세상엔 氣를 알고 사는 사람과 氣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氣를 아는 사람은 세상을 움직이는 또 다른 힘이 있음을 알고 삽니다. 그러나 氣를 모르는 사람은 돈과 권력만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氣를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그러나 氣를 모르는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에 가 있습니다. 氣를 아는 사람은 Relax 상태로 살지만, 氣를 모르는 사람은 긴장이 지속되고 몸과 마음이 불편합니다. 氣는 눈에 안 보일 수 있지만 실재(實在)합니다. 氣가 없으면 글을 읽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氣는 존재를 알아차리게 하는 動力이다. 그러므로 氣가 끊어지면(氣絶) 모든 의식 활동도 끊어진다. 기절했던 사람이 의식이 없었던 동안의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의식 활동을 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氣이다. 사람이 죽으면 氣가 끊어진다. 氣가 끊기면 조만간 뇌와 심장도 정지한다. 하지만 氣가 살아있는 한 회복한다. 仙道 수련은 존재와 에너지를 늘 항상하게 하는 것이다. 선도에서 長生不死를 이야기하는 근거는 거기에 있다. 仙道에서 小周天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존재(覺)와 에너지가 연결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존재와 에너지의 결합이다. 民族精氣가 살아있는 한, 그 나라는 사라지지 않는다. 불행하게 국토를 빼앗긴다고 할지라도 氣가 있는 국민은 언제..
벌써 2018 달력이 한 장만 남았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간다. 그러나...모든 것이 지나가도 마치 CCTV 렌즈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만은 如如하다. 그것을 사람들은 "覺" 혹은 "眞我"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것도 에너지가 다하면 작용이 중지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오직 에너지(氣)만이 에너지를 작용시킨다. "나는 누구인가?"를 이렇게 바꿔 말하면 어떨까? 《에너지(氣)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모든 것은 지나가도 氣는 영원하다. 그것은 모든 것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많은 것(知識)을 주지만, 스승은 제자가 얻어 지닌 것들을 모두 뺏는다. 그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단지 마음속 거품을 걷어내어 本性品 자리를 드러나게 해준다. 그러므로, 스승을 만날 땐 자기를 맡겨야 한다. 무언가를 얻으려 해선 안 된다. 오히려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내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얻어온 잡동사니들이 모두 무산되었을 때, 비로소 實在가 출현한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ready-made, 먹고 입고 쓰는 것을 구하려면 선생으로 족하다. 스승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생기지도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에너지)을 준다. 스승은 에너지 자체이다. 그가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아버지는 나를 낳았지만, 스승은 나를 復活시킨다.
하늘이나 땅이나 氣(에너지)로 가득합니다. 내 몸과 밖 모두는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존재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보통 공적(空寂)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氣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알아챔이 견성은 아니며, 論理의 깨우침도 견성은 아닙니다. 五感을 떠난 실감(實感)이 活潑潑 살아 있어야 제대로 된 見性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야 실생활로 연결되니 말입니다. 그럴 땐 필히 氣(에너지)가 동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存在는 에너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는 생각의 간극, 마치 휴식 시간 중의 텅 빈 스크린처럼 고요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우리의 본마음이며, 그 자리의 作用에 의해 세상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숨겨지고,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 자리 없이 우리는 生存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에너지의 원천자리이며, 우리는 그 자리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고 삽니다. 에너지 없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見聞覺知 마디마디마다 소리소문없이 나타나, 있는 듯 없는 듯, 에너지 충전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造化입니다. 하지만 無知의 소치로 우리는 그 소중한 자리의 가치를 망각하고 그 귀하디귀한 에너지의 기회들을 낭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번뇌 망상으로 인한 에너지 고갈로 대부분의..
잠을 자는 이유는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단 몇 분 깜박 잠을 잔 것 같은데 온 몸의 피로가 풀리고 정신이 맑아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너지 충전의 효율화 때문입니다. 아무리 잠을 많이 잤어도 잠자는 내내 이것저것 별 소용이 없는 잡생각들이 끊기지 않았다면 에너지를 낭비했을 뿐 잠을 자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땐 잠에 집착 말고 긴단한 外丹功과 丹田 주시를 배워 보세요. 잠보다 더 깊은 에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집중이 잘 안 되는 것은 에너지 충전이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그럴 땐 만사를 제치고 에너지 보충을 해 줘야 합니다. 이 세상은 에너지 덩어리이며, 존재 역시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잘 통하면 건강하고..
조선 시대 선비들의 다툼은 '理가 우선이냐, 氣가 우선이냐'였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가 먼저냐, 여자가 먼저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자가 없이 여자는 없으며, 여자가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氣가 理를 따르고 있든(理發氣隨), 理가 氣를 타고 있든(氣發理乘),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역시 없기 때문이다. 自覺을 이룰 때 사람들의 공통적 경험은 상당한 에너지(氣)의 체험이다. 그러나 자각도 관리(補任)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희미해지는데, 그것이 氣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에 에너지 없이 작동되는 일은 없다. 깨우침을 얻었던 사람이 다시 우매해져 재관(財官)을 밝히거나, 사교..
계합(契合)은 마치 볼트와 너트가 들어 맞듯, 本來面目 그 자리에 들어앉는 것입니다. 성령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一心만 있으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모든 에너지는 애씀이 없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너지를 깎아내리는 오류를 범하지는 마십시오. 세상만사 에너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계합 역시도 에너지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마치 전기가 연결되면 화면이 살아나고 선풍기가 돌아가듯 모든 일은 에너지의 작용입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본성(本性) 자리를 볼 수 없으며, 그 자리에 들어앉을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仙道에서 氣를 강조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에너지가 없..
중생(衆生)은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로 만든 '가상(假想)'의 세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소유의 고통 속에 산다. 실상(實相)의 세계로 회귀(回歸)하는, 즉 도피안(到彼岸; paragate)을 위해서는 得 Anuttara-samyak-sambodhi,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최고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재'라는 바늘구멍이며, 그것을 통과하기 위해선 깊지도 앝지도 않은 특별한 삼매(samadhi)가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 더 이상 내려 놓을 것이 없는 경지이다. 그 자리는 오직 현재를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소유가 끊어진 자리, 中道의 자리에 들어갈 때 비로소 도피안(到彼岸)이 이루어 진다. 中道는 무중력의 자리다. 로켓을 대기권 밖으로 밀어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