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9.0 기운 공부: 氣 (Cultivation of Gi) (52)
谷神不死
그 자리를 깨우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지 않습니다. 빈틈이 없기 때문에 비어있다고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그 자리가 가득 차 있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 자리는 에너지(氣)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닫혀 있어서는 답답한 것은 나입니다. 문을 열면 나도 세상도 밝아집니다. 우주가 모두 네 암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벽(開闢)이 일어나야 합니다. 활짝 열릴 때, 어리석음은 녹아버리고 밝음이 온 세상을 비추게 됩니다. 온 세상은 나와 우주가 함께 춤추는 그 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모두가 밥을 먹었어도, 내가 안 먹었으면 허기가 질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밝아졌어도, 내 눈이 감겨 있으면 어두울 것입니다. 聖人이 무더기로 나더라도, 내 눈 귀 막혀 있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 눈이 밝아지면 세상의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닙니다. 우선 나부터 깨우치고 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우선 에너지(氣)부터 연결하세요. 에너지가 약하면 불빛이 흐려집니다. 밝음은 에너지로부터 옵니다.
마중물이란 펌프질을 할 때 위에서 붓는 물을 말한다. 아이 적에는 마중물이 물을 만들어낸다고 믿지만, 어른이 되면 진실을 알게 된다. 물은 땅속에 무한히 있다. 사용하는 우물은 마르지 않는다. 퍼내면 다시 고이기 때문이다. 마중물을 식(識)이라 하고, 밑물을 氣라고 비유할 때, 識은 처음 氣를 알아챌 때만 필요하다.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이 氣(에너지)이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氣를 무시하라고 가르친다. 그들의 주장을 들으면 識이 주(主)이고, 氣는 객(客)이라는 것이다. 무식해도 너무 무식한 이야기다. 세상에 識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皆是虛妄). 識이란 바람같이 나타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識이 主이고 氣는 客이다'는 말은 마치 파도가 치는 것을 보면서 바람..
'그 자리'를 깨우쳤다는 사람이 있다. 알고 보니 오직 그것뿐, 세상사 모두가 그 자리로 수렴되고, 모든 作用이 그 자리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가리켜 깨달음, 見性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사실 그 자리는 찾아 헤맬 필요가 없는, 원래부터 그 자리요, 손대지 않아도 그 자리다. 그 자리는 언제나 如如하게 지금 여기에도 있다. 그 자리는 값으론 환산할 수 없는 너무 가치 있는 자리다. 하지만 그 자리를 팔아서는 라면 한 개도 사지 못한다. 그 자리(無爲自然)를 값지게 지켜주는 것이 있다. 그 자리를 빛나게 해주는 것(作用)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자리는 有名無實하다. 그것을 모르면 그 자리는 無用之物이 된다. 그 자리를 알았다면 늘 함께하는 나머지 하나도 알아야 정상이다. 그것..
구원이 기독교에만 있지 않듯이 깨달음도 불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압니다.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서로 옳다고 다툴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만 내려놓으면(無念無想), 그대로 깨달음이고 구원입니다. 기도나 명상을 통해 하루 10분 만이라도 그 자리, 순수의식에 머물러 보십시오. 그 자리는 에너지 충전의 자리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깨어있음이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하는 당체(當體)에 관심을 두는 것(回光反照)입니다. 그곳이 깨달음이고, 천국이고, 구원의 자리입니다.
氣가 理를 따르든(理發氣隨), 理가 氣 등에 타고 가든(氣發理乘), 理氣는 一元이다. 예로부터 주리론(主理論)에 심취하여 氣를 경시하는 점잖은 인사들이 있었는바, 조선(朝鮮) 시대 주리파(主理派)의 태두(泰斗) 퇴계(退溪)는 理만을 주장하다가 젊은 주기파(主氣派) 기대승(奇大升)과 율곡(栗谷)에게 꼬리를 밟혔겠다. 비교 안 되는 것을 차별하려 억지를 부렸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性은 理를 근거로 드러나는 것인바, 理氣가 한통속이라면 性과 氣의 족보를 어찌 정리해야 하는가? 理만을 중요시하고 氣를 경시하는 것은 살림에 보탬이 되지 않는 건달 남편이 고생하는 아내에게 반찬 투정하는 격이요, 연료를 넣지 않고 비행기를 띄우자는 짓이니, 이 어찌 난감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氣가 없으면, 理가 없으니..
사람은 정기신(精氣神)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에 자리한 氣가 生命을 유지하는 중심체이자 의식을 作動시키는 원동력입니다. 氣가 빠지면 몸은 무너지고 意識 역시 사라집니다. 氣가 몸(精)과 마음(神) 사이에서 둘을 연결하고 있으므로, 氣가 제 기능을 하고 있어야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氣가 不調를 이룬 것을 병이라 하며, 氣가 끊겨 떠나 버린 것을 가리켜 죽었다 합니다. 仙道는 氣를 통해 몸을 조화롭게(調身), 숨을 조화롭게(調息), 마음을 조화롭게(調心) 하는 수련법입니다. 그것을 통해 밝음(깨달음)을 얻고 건강과 함께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이루게 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행법입니다. 그것은 氣를 가진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仙道는 精, 氣, 神 공부이고, 그 첫 단계가 연정화기(鍊精化氣)입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이 몸을 닦아(鍊) 에너지 몸(氣)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通氣, 蓄氣, 雲氣를 지속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몸이 아닌 또 하나의 몸, 氣의 몸을 얻게 됩니다. 그 단계를 연정화기라 합니다. 처음엔 미약하게 氣를 느끼던 것에서, 丹田이 깨어나면서 전신적 통기가 이루어지고, 이어서 에너지 경로(route)를 따라 흐르게(運氣) 되어(小周天), 마침내는 전신이 에너지 덩어리(氣體)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일단 에너지 몸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永久的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통기, 축기, 운기 과정을 모두 거쳤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대자유인, 즉 神仙이 됩니다. 세상이 그의 자유를 구속하지 ..
의식(意識)이 없는 사람을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육체가 생생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仙道의 연기화신(鍊氣化神)은 의식(神)과 에너지(氣)를 일체화시키는 수련입니다. 氣가 없이는 意識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仙道의 수련은 의식과 에너지의 합체화 작업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 둘의 분리된 것을 죽음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선도의 수련 과정, 즉 통기(通氣), 축기(蓄氣), 운기(運氣) 그리고 태식(胎息) 하나하나가 의식과 에너지를 하나로 묶는 노하우(know-how)입니다. 그것이 바로 仙道가 말하는 長生不死의 근거입니다.
先代들은 이기(理氣)를 가지고, 어느 것이 主가 되느냐로 다투었다. 그것을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라 한다. 초반엔 대체로 '관념(觀念)이 主(이발기수;理發氣修)'라는 주장이 우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주도권은 '生命(氣)이 主(기발이수;氣發理乘)여야 한다'로 변했다. 理와 氣는 일원(一元)이다. 우주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用의 차원에 오면 그 둘은 다르다. 하늘과 땅은 근원이 하나지만 엄연히 다른 것처럼... 남자는 여자가 있어야 하고, 여자 역시 남자가 있어야 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이다. 觀念만으론 허망하다. 그것으로 生命을 대체할 수는 없다. 생명(氣)이 活潑潑할 때, 그것도 제값을 드러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