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5)
谷神不死
혹시 불교가 아니면 깨달음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예수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고 생각하는가? 불교보다도, 혹은 예수보다도, 당신이 먼저이지 않던가? 불교와 예수가 없어도 당신 자신은 있다. 불교가 아니라도, 예수가 아니라도, 깨달음과 구원은 언제나 있다. 그 일들은 모두 당신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책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책 표지에 성스럽단 말(Holy)이 골백번 쓰여있어도 말이다. 마치 사진을 보거나 밥이란 소리를 듣는다고 배부르지 않듯이... 깨달으려면 책에 쓰여있고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성스럽다(?)는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 믿지 말라. 그것들이 하느님(存在)과 직접 만나는 것을 여태껏 방해해 왔다.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진짜 하느님(聖靈)을 만나야 한다. 그 순간, 그동안 얼마나 많이 속고 살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평생 믿어왔던 것들에서 벗어나라. 그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최선의 길이다.
경전(經典)은 지루하다. 간단히 한 번만 말하면 되는 것을 중언부언(重言復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의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각기 이해도가 달라서 무엇이 입맛에 맞을지 모를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살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가급적 간단히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아니면 누구도 접근조차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차하게 탐심과 성냄, 어리석음(三毒)을 나누어 말할 필요가 없다. 어리석음 이야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 사라지면 탐심과 성냄은 저절로 눅어 버릴 것이니... 그리고... 피곤하게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일일이 설할 필요조차 없다. 팔정도의 첫째, 바른 견해(正見) 하나에 모두가 수렴될 것이니 말이다. 예수의 "..
경계를 따라가지 말고, 경계를 쫓는 그놈을 보라(回光返照)고 말한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對象)은 내가 아니며, 보고, 듣고, 느끼는 당체(當體)가 "나"이다. 아주 간결한 답이다. 그렇다면 보고, 듣고, 느끼지는 대상(對象)이 없이 그놈만 혼자서 존재할 수 있을까? 주시자(注視者)와 관찰자(觀察者)가 따로 존재하는가? 이제 다시 어려워졌다. 여기서부터 노자(老子)가 빛이 나기 시작한다. 老子의 "그저 내려놓을 뿐"은 간단하지만 너무나 핵심적이다. 헛짓거리하지 말란 말이다.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만, 붓다는 그 자리(見處)로 통하는 네 개의 통로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몸, 느낌, 마음, 대상이며, 이름하여 '사념처(四念處)'이다. 우리가 감지(感知)하는 것 중 무엇 하나도 '그 자리'를 가리키지 않는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느라, 늘 그 자리를 놓치면서 세상을 산다. 생각에 팔렸으면 사실상 눈과 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을 얻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간절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깨우침(自性)은 너무나 당연하여서 우리가 너무나 오랜 세월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두두물물(頭頭物物) 하나하나 그 자리(見處)를 가리키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 황망(慌忙)하게만 살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간단히 말하여, 정견(正見) 하나만 닦으면 된다. 그것으로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 모두가 회통(回通)되기 때문이다. 대승(大乘)이라는 사람들이 소승(小乘)과의 차별화 전략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는 것을 고안했는가 본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유희(遊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正見 하나만 이루고 나면, 소위 六波羅蜜이라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역시 자동 진행이기 때문이다. 六波羅蜜로 보살(菩薩)의 지위(地位)를 상승시킨다고 하는데, 菩薩의 차원에서는 지위(地位)라는 것 자체가 망상(妄想)이고, 허공에 금을 긋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몸이 있고, 마음이 있으며, 이 몸과 마음이 대상을 접(接)하며 삽니다. 그러나 의식이 깨어나(觀自在), 주인의 자리(本來面目)에 이르면, 이 몸과 마음이 있으되 있는 것이 아니고(五蘊皆空), 없어도 없는 것이 아니게(非非我) 되면서, 시공(時空)과 선악(善惡), 유무(有無)에 더 이상 구애받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그때는 당연히 더 이상 알 것도, 얻을 것도 없어지고, 모든 삶의 어려움과 공포가 사라지고, 이어지는 만족과 감사함 속에,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이 영원히 이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세계입니다.
우리에겐 두 종류의 하느님(부처)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생각이 만든 가짜 하느님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생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진짜 하느님이다. 인간은 왜 하느님(부처)을 만드는가? 첫째는 의지처(衣地處)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다. 일단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지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속박의 삶이 시작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가상(假想)의 그것에 부탁하게 되고, 그다음부터는 그것의 눈치를 보면서 어렵게 살게 된다. 그것을 간파한 교활한 종자들은 스스로를 하느님(부처)의 대역(代役)이라고 주장하며, 복(福)과 죽음을 볼모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쉽게 속아 넘어가는가? 진짜 하느님(부처)을..
보이는 대상과 보는 놈은 하나이다. 대상이 없으면 보는 놈이 없고, 보는 놈이 없으면 대상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은 계속해서 변한다. 하지만 보는 놈, 듣는 놈, 느끼는 놈과 텅 빈 화면(screen)은 변치 않고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주인공으로 살면 아쉬움과 고통이 사라진(無苦集滅道), 언제나 소풍 같은 즐거운(常樂我淨) 인생이 펼쳐진다.
"오매일여(寤寐一如)"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시종일관 화두(話頭)를 놓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긴장을 푸세요. 따로 寤寐一如를 유지하도록 애쓸 필요 없습니다. 그 자리(見處)는 우리를 떠날 수 없는 자리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돈오돈수(頓悟頓修)'라 하는 겁니다. 견처(見處)를 얻고 나면 애쓰지 않아도 언제나 그 자리(空寂)와 함께 살게 됩니다(無爲自然). 그 자리가 바로 "존재"이니 말입니다. 아주 가끔 센서(sensor)가 버벅댈 수 있습니다. 그럴 땐 잠시만 기다리면 다시 정상화됩니다. 컴퓨터를 껐다가 켜면 정상화되듯이 말입니다. 자기를 믿으세요.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누가 나를 믿어 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