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5)
谷神不死
자유를 원하는 것 같아도, 사람은 무엇인가의 지시를 따를 때 안정감을 얻는가 보다. 혼인 전엔 아버지, 혼인 후엔 남편, 남편이 죽고 나면 아들을 따르는 것이 여인이 지켜야 할 '삼종지덕(三從之德)'이라지만 그것이 어찌 여인네 뿐이랴 ! 남정네 역시 마찬가지다. 뱃지(badge), 유니폼을 좋아하고, 국가주의와 신앙의 깃발 밑에 모여야 무언가 된 듯하니 말이다. 거기에 '덕(德)'이란 수식어가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남녀불문 三從之德은 아무래도 돈, 권력, 명예이리라. 그것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살며, 그것을 지키려 殺人까지 서슴없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져도,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아무리 칭송을 받아도, 돌아서면 허전하기만 할 뿐이니까... 무지..
공부는 지금 여기서 해야 합니다. 죽어서 흙이 되면 공부할 수 없습니다. 지옥에 가면 벌 받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고, 천당이나 극락에 가면 상 받느라 공부할 여유가 없습니다. 천당을 가고, 극락을 간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면 어찌 그곳이 천당이고 극락이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깨우치면 이곳이 극락이고 천당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 의식을 자아(Ego), 본능 의식(Id), 초자아(Super-ego)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에고(ego)는 생각이 주역을 맡고, 선악(善惡)과 시공(時空), 그리고 손익(損益)의 지배 아래 있으며, 이드(id)는 그저 본능일 뿐, 선악이나 합리적 생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초자아(super-ego)가 문제인데 정신분석학은 그것을 우리를 통제하는 도덕적 양심이라 풀이한다. 그러나 맞지 않는다. 그것 역시 의식(ego)의 영역 아래 있기 때문이다. 초자아는 글자 그대로 자아(自我)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선악과 시공을 벗어나 있으며, 합리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것이며, 에고(ego)와 이드(id), 그리고 世上의 바탕이다. 프로이드는 훌륭하지만 그 세계까지는 보..
깨우침을 얻은 한 도인(道人)은, '부처가 무엇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만 답했답니다. 한 제자는 그 말을 '짚신이 부처'라 알아듣고 자나깨나 '짚신시불'을 외웠는데 결국 큰 깨우침을 얻었다지요.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이 귀신을 부르는 주문(呪文)을 들어보니 금강경(金剛經)이었답니다. 금강경은 귀신을 부르는 주문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경전인데 말입니다. 氣가 강하다고 소문난 애리조나(Arizona)의 세도나(Sedona)를 가보았는데 LA나 한국의 어느 지역에 비해 딱히 강한 에너지는 없었습니다. 평생 氣를 닦아서 알만큼은 아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십자가가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 만(卍) 자나 태극(太極), 그리고 육각 모양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
태어날 때 유전자에 따라 모습이 다르고, 약간의 지능(知能) 차이는 있을지언정, 남다르게 상근기(上根機)인 사람은 없다. 깨달음은 그 사람의 신분(身分)이나 知能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노자의 말에 "상사는 道를 들으며 힘써 행한다(上士聞道勤而行之)"고 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道를 사모하는 사람, 시간만 나면 머릿속이 도통(道通)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는 사람, 그 사람이 上根機이다. 당신은 하루 중 道를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上根機와 下根機는 당신이 결정한다.
이 몸이 나는 아니고, 이 마음이 나는 아니건만, 나는 먹고, 움직이며, 잠자며, 느끼고, 생각하고, 다짐하고 알아챕니다. 내 몸과 내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습니다(五蘊皆空一切苦厄). 무엇이 고통을 느끼겠습니까? 공부 좀 한다는 사람 중에 "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진정 내가 없을까요? 우리는 보통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면 없다고 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세상엔 생각 밖의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아무리 이름 붙이려 해도, "이것이다" 하기 어려우니, 그것에 '무아(無我)'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無我는 '나'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나'는 없는 것 같은 형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無我란 말을 ..
깨달음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것을 '관자재(觀自在)'라고 합니다. 사람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것은 생각이며, 그것이 분별심(揀擇)을 일으키며, 그것이 번뇌(煩惱)를 가져옵니다. 그 생각들은 모두 보이는 것들(見聞覺知)에 의해 생겨납니다. 그것을 가리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합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일단 영(零: Zero)의 자리, 즉 생각이 없는 자리(無念無想), 보이는 것이 없는 자리(無所不在)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활동을 개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있었던 마음과는 다릅니다. 그것을 순수의식(純粹意識)이라고 합니다. 그 후 보고 싶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관(觀) 입니다. 그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게..
미식가(美食家)는 식당을 찾아 여행합니다. 그들은 조미료와 설탕을 많이 쓰는 식당은 기피합니다. 조미료와 설탕이 전국의 식당을 통일했습니다. 그 맛이 그 맛이 되어 버렸습니다. 깨달음을 일깨우는 스승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행복한 일입니다. 개벽(開闢)이 무르익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맛이 그 맛'이라는 것이 아쉽지만 말입니다. 가급적 발품을 많이 파시기 바랍니다. 견문(見聞)이 넓어지면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도 있습니다. 석가모니도 이 스승 저 스승을 많이 거쳤다지요. 말솜씨나 외모, 식견보다는 진정성을 확인하세요. 가급적 순수한 식자재로 조미료나 설탕 없이 요리하는 식당을 선택하세요. 맛집을 찾아다니듯이 다소 멀더라도 가급적 많은 스승을 찾아다니세요. 어떤 스승이 당신에게 진정한 밝..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밝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槪念)이 잡혀있는 것을 말한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라는 말이 있다. 성인(聖人)의 말씀이라 해도, 개념이 없는 사람은 잘못 알아듣기 십상이다. 오히려 오해 거리가 더 많다. 헷갈리기로 말하면, '무아(無我)'보다 더한 것은 없지만, 오늘은 三毒(貪嗔癡)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욕심(貪)과 성냄(嗔), 어리석음(痴)을 '삼독(三毒)'이라 하며, 중생(衆生)의 기본 속성이다. 깨달은 자에게는 진정 탐진치(貪嗔癡)가 전혀 없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도 역시 바라는 것(貪)이 있고, 화가 나기도 하며, 더러는 헷갈리기도 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숨기지 않는다. 억눌러 위장하는 것이 깨달음은 아니다. 다만 순리(順理)를 역행하여 바라지 않..
임마누엘(Immanuel)이란 말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계십니다.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내려놓아 보세요. 순간 거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것을 알아챈 것을 가리켜 '깨달음(見性)'이라 하고 '성령(聖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그것보다 더 안락하고 평화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어디에 몸담고 있든, 하느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주(the Spirit)를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존재(presence) 앞에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천국(Heaven)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무덤(hell)에 들어갈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시편 13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