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5)
谷神不死
성령(聖靈)은 하느님의 활동력이며 父, 子, 靈 삼위(三位)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셋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해가 어렵겠지만, 三位는 일체(一體)이며, 성령은 곧 하느님이다. 성령을 만난다는 것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요한 17 : 21~), 그것이야말로 바르게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영(靈)이시다. 그에 관한 기록 "질투의 神(신명기 5:9)"은 전적인 오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가당치 않다. 그를 인격(人格)으로 분류해선 안 된다. 그러한 주장에는 다분히 그리스 신관(神觀)이나 유대의 민족주의가 가미되지 않았나 추측한다. 하느님은 모습이 없다. 그는 단지 사랑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는 형상을 터부시하는 이슬람의 방식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無所不在하시다. 그분은 일부..

유대교, 이슬람, 가톨릭, 그리고 개신교는 동일한 神을 섬기는 것 같아도, 접합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나면 다툼만 일어날 것입니다. 힌두교와 소승(小乘)불교, 대승(大乘)불교, 선(禪)불교가 동일한 부처님의 가르침인듯싶어도, 서로 간의 격차는 기독교와 불교만큼 큽니다. 두리뭉실 그것들을 맞추어 보려 하는 것은 크기가 다른 볼트와 너트를 결합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소승의 교리가 좋아 보이면, 대승의 옷을 벗고, 대승의 집을 떠나 조용히 그쪽으로 가면 됩니다. 개신교를 신앙하면서 유대의 神(Ya)을 아버지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를 인정하는 건 무방하나, 그를 찬양하는 것(Hallelujah)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들(Jews)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과연 그(Yahw..

세상엔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구별할 수 있으면 마음 편히 살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변치 않는 것을 알아챈 것이며,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며 사는 사람을 선인이라 합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 다짐하는 것과 알음알이들은 모두 변하는 것들입니다. 이 몸과 마음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지혜 제일이라고 알려진 솔로몬은 그의 책(전도서) 첫머리를, "헛되고(vanity),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 : 2)"로 시작해, "지혜가 많으면(much wisdom) 번뇌도 많고(much grief),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한다(1: 18)"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의 글들을 검토해보면 아마도 그의 지혜만으로는 변치 않는 것, 헛되지 않은 것..

이해하고, 그것을 정리하는 힘이 있는 사람을 '학자(學者)'라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이해와 정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생각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진실(眞實)을 보려면, 생각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심안(心眼), 혹은 혜안(慧眼)이라 합니다. 생각만으로는 본래의 자리(本來面目)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의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道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至道無難)." 말씀을 새겨 챙기면 곧 깨닫습니다. (言下大悟) 초기 경전을 보면 싯다르타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을 아라한에 이르게 했고, 역대 祖師들도 말 몇 마디에 깨달음을 실었습니다. 기독교 경전에는 "말씀(Word)이 곧 하느님이시라(요한 1:1)"는 말도 있습니다. 바야흐로 깨달음의 시대입니다. 하늘이 당신을 돕습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 모두가 깨우침의 에센스입니다. 그것이 심장에 이르도록 허락하십시오. 흘려 지나치게 하지 마십시오.
한 불교 승려가 교황을 만나 물었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 모양입니까? 어찌하여 착한 사람이 핍박(逼迫) 속에 살고, 악인들은 득세(得勢)하나요? 그 질문에의 교황이 말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데... 이야기의 진위(眞僞)를 따지기에 앞서, 알만한 사람이 몰라도 너무 무식한 질문을 한 것 아닌가? 한 생각 놀이에 善도 되었다, 惡도 되었다 하는 것이 아니던가? 도대체 착하다는 것과 악인은 누가 정하는가? 질문자가 불교인이라면 분명 "나라는 것은 없다(無我)"와 "모든 것은 변한다(無常)"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터인데, 핍박받는 사람은 누구고, 득세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양지(陽地)가 음지(陰地)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알 터인데, 핍박은 영..
"내가 누군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한 불교 교육책임자는 이 말을 한 것으로 인해 여러 사람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그를 비난한 자들은 자기가 누군지를 이해하며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직자(聖職者)라 할지라도, 자기를 이해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혹시 이해했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를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서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직접 밥을 먹어야 허기가 채워지는 법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막연한 이해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남의 말을 듣고 그런가 보다 해서는 안 된다. 늘 깨달음과 함께 불성(佛性)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아니라면 성령(聖靈)이 생활 속에 녹아나야 한다. 언제나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여야 한다.
보이는 것이 있고, 보는 놈이 있고, 둘을 작용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들리는 것이 있고, 그것을 알아채는 놈이 있고, 둘을 연결하는 것이 있습니다. 느끼는 대상이 있고, 느낌을 받는 놈이 있고, 느끼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만들고, 유지하고, 부수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 모든 것의 총괄자, "주인공"입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구원이고, 해탈(moksha)입니다.
엄마 젖을 빨면서 "이것이 없으면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아기는 없습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한 가뭄을 겪지 않으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無爲自然)에 의지하여 일하고, 재산 모으고, 번식하고, 잘난 척하며 살지만, 그 자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깨우침을 얻기가 그리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當然)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늘 그 자리 속에서 숨 쉬며 살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승이 있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는 늘 그 자리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구원, 천국, 열반(涅槃) 해탈(解脫)은 모두가 그 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것이 열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개안(開眼)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지성(知性)입니다. 그리되면 세상사에 휘달리지 않고 살게 됩니다. 고요함에 머무르는 공부를 아무리 오래 해도 소용없습니다. 허깨비를 허깨비로 아는 눈이 없으면, 멀쩡히 눈 뜨고 계속해서 코를 베이게 됩니다. 맨날 같은 단어나 되뇌면서 벽을 보고 앉아 있거나, 숨만 바라보는 것으로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결정적 뒤집기가 필요합니다. 시끄러움 속, 혼란 속에 부대끼고 살면서 다각적으로 닦아야 제대로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 눈을 제3의 눈, 혜안(慧眼), 도안(道眼), 신안(神眼)이라 합니다. 눈이 열려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