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적어도 50살 이상 살았다면 그동안 적어도 몇천 명의 사람은 만났을 것이다. 재밌게 놀아주던 동네 친구들, 초등, 중등, 대학의 친구들에서 시작해, 나를 좋아했던 사람, 내 가슴을 절절하게 했던 사람, 내가 필요해 만난 사람들, 나를 필요로 해서 만난 사람들, 사람들...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 그 중엔 이 사람이라면 평생 친구로, 동료로, 동반자로 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폰 속에 전화번호라도 남아 있는가? 아마도 패티의 노래 속,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요"처럼 되었을 것이다. 여간한 로맨티스트가 아니라면 아직도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라고 읊조리지는 않을 것이다. 필요가 다해 사라진 사람들, 사소한 오해로 절교한 사람들, 사람들....

명상(冥想)은 수면(睡眠)과 같다. 제대로만 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시적이란 면에서 잠과 거의 다르지 않다. 명상은 사치품과 같다. 아무나 엄두내는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명상에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을 위해 어려운 일, 포기를 가르치지 때문이다. 잠만 잘 잘 수 있다면, 자기가 누군지만 안다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명상이다. 눈만 감아도 명상이요, 숨만 지켜볼 수 있어도 명상이다.

돌쇠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아빠가 물었다. “너 지금 뭐하니?” “응, 친구에게 편지 써” “너 글씨 모르잖아” “괜찮아, 그놈도 읽을줄 몰라.” 10분만 정신차려 들으면 알아들을 이야기를 몇 십 년, 몇 백 년을 들었어도 감감무소식, 먼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나는 누구인가?”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첫째, 알려주고픈 마음이 없다. 둘째, 겉으론 듣는 척 해도, 돈이 안 되는 그런 주제엔 관심이 없다. 셋째, 사실 이야기하는 놈도, 듣는 놈도 자기들이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코메디 아닌가?

인도에서는 스승을 신(神)과 동격으로 모신다. 그리하는 이유는 나누어만 줄 뿐, 나로부터 가져갈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말보다 실천이다. 만리장성같은 말을 할지라도, 행동이 없다면 개 짖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 바쁘게 움직이고, 숨 죽이고 조용히 앉아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살아있는 스승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가 물어야 한다. 그것이 스승을 스승으로 대접하는 길이다. 스승 앞에서는 자기를 점검받아야 한다. 그것이 스승이 존재하는 이유다.

물이 흐리거나 파도가 치고 있는 동안은 우리는 물 밑의 풍경을 볼 수 없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잡생각에 시달리거나, 이런저런 것들(사상과 信仰)에 잡혀있다면, 자기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을 알 수가 없다. 몸과 마음, 그 둘은 나(The Self)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둘을 통하지 않고 자기를 찾을 수는 없다. 깨달음을 원한다면 자기를 고요하게(入靜) 만들어야 한다. 그보다 더 확실히 몸과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은 없으니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과학이 증명하는 바이며, 오랜 세월 그것에 자기를 바친 수행자(修行者)들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그것을 몰입(沒入), 입정(入靜), Samadhi(禪定)라고 말하며, 그것은 모든 수행자들의 공통적인 바램이다. 관건은 어떻게 자기를 고요하게 만드느..

정신적 편안함과 깨달음은 불가분의 관계다. 깨달음이란 해탈, 즉 편안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편안함이 지속되면 고요함을 알게 되고, 그것은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누구라도 편안함을 체험하며 살지만, 그들에게 깨달음이 없는 이유는 생각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확실한 물질적 안정만을 추구한다. 그것은 깨달음과는 다른 길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흔들리지 않는 견해(正見)가 생깁니다. 사고작용이 정리(正思)되므로, 이치에 맞춰 우왕좌왕하지 않는, 누가 들어도 끄덕일 만한 말(正語)을 하게 되고, 행동도 그에 따라(正業)하게 됩니다. 자기를 늘 살펴보십시오. 만약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면 공부가 좀 더 필요합니다. 단전(丹田)이 열리면 생각이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에너지(氣)의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에 여유가 생기고 당당해집니다. 에너지(氣)가 여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집니다. 신(神)과 기(氣)가 계합(契合)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밥 담았던 그릇에 김치를 담았다가 비우고 다시 국을 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릇이 오렴되지도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설탕 만들던 회사가 라디오를 만들고 이제는 반도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가 없어졌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개었다, 흐렸다 해도 마음은 마음일 뿐입니다. 성인(聖人)이 그리 말했다고 해서 앵무새처럼 그를 따라 “내가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내가 없어지는 날이 올 때까지는 나는 나에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과연 언제 내가 없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든 성공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양신(養神) 공부는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구년면벽(九年面壁)으로 표현됩니다. 그 말은 불가(佛家)에서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조실(祖室)들은 요구합니다. “앉아있는 1시간 내내 딴생각은 하지 말고, 고요히(禪定) 벽만을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매우 훌륭하지만, 범인(凡人)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목숨을 걸만한 처절한 각오가 없다면 말입니다. 선도(仙道)의 의수단전(意守丹田)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쉽습니다. 하지만 먼저 통기(通氣)와 丹田 깨어남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단전공부는 불교 사념처(四念處) 공부의 종합편입니다. 丹田을 意守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풍경(身受心法)들을 봅니다. 仙道만의 기운이 모이고 흩어지는 액티브(active)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