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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내(존재)가 아닙니다. 생각을 쉬어야 실재(實在)가 드러납니다. 생각이 없어도 나는 존재합니다. 그것이 Fact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기는 이를 따르고(理發氣隨), 이는 기를 타고(氣發理乘)있다는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의 상반된 주장이 있습니다. 그 둘은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라 아무나 쉽게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명(自明)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일들을 '알아채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성(自性)이라 하고, 알아챈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알아채는 자가 없다면 主理든 主氣든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보고, 듣고, 느끼며 삽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주인으로 살지만, 중생(衆生)은 하인으로 삽니다. 주인은 늘 여유롭습니다. 끄달리지 않고 삽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늘 불안합니다. 혹시 잘못될까 근심 걱정을 일상사로 삽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사자라면 衆生은 개와 같습니다.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그것을 쫒아 달리지만, 사자는 흙 던진 자를 뭅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흔들리지 않는 견해(正見)가 생깁니다. 사고작용이 정리(正思)되므로, 이치에 맞춰 우왕좌왕하지 않는, 누가 들어도 끄덕일 만한 말(正語)을 하게 되고, 행동도 그에 따라(正業)하게 됩니다. 자기를 늘 살펴보십시오. 만약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면 공부가 좀 더 필요합니다. 단전(丹田)이 열리면 생각이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에너지(氣)의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에 여유가 생기고 당당해집니다. 에너지(氣)가 여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집니다. 신(神)과 기(氣)가 계합(契合)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세수하다 코만지기보다 쉽다는 말이 있듯, 단전(丹田) 호흡도 마찬가지입니다. 번뇌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면 백날을 다리 꼬고 앉아있다 할지라도 깨달음의 갈피조차 잡지 못하듯이, 丹田 활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돈과 권력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을 단번에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듯이 단전 살려내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중 얼마나 깨달음에 마음 쓰고 사는지, 얼마나 의수단전(意守丹田)에 성(誠)을 다하는지 스스로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의 미래입니다. 아무도 대신 신경 써줄 수 없으며, 아무도 대신 공부해줄 수 없습니다. 선도(仙道)는 이론이 필요 없습니다. 먼저 丹田부터 열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불문(佛門)..

행복은 돈이 있고 없고, 권세가 있고 없고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고, 자기 길을 갈 줄 알아야 행복하다. 늘 긍정적이며 감사하는 생활이 행복을 준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근심 걱정이 없다. 근심 걱정이 문제해결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만족하는 지족(知足)의 삶이야말로 행복을 부르는 생활태도다. 나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무위(無爲)의 삶을 지향한다. 일종식(一種食)에, 잠들고 깨는 시간이 일정치 않지만 거의 불편은 없다. 각자 자기 길이 있겠지만 나는 선도(仙道)를 닦는다. 어연 40년에 최소한 문고리는 잡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만 하며 70객이 되었다. 이제는 글쓰고 가르치는 일이 소일꺼리다. 수행에 의지가 있는 언제든 ..

하늘을 올려다보고서, '하늘을 다 보았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 올라 지상을 내려다본 후 해도 늦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란 말을 들으면 대개는 시큰둥이다. 입바른 사람은 그걸 알면 뭐가 바뀌는데? 라고 비웃거나, 그런 건 배부른 사람들의 망상놀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성(自性)을 깨우친 사람이라면 아마 빙긋이 웃을 것이다. 그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라고 말 할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것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이 아닐까?

'의리선(義理禪)'이란 공안(公案)의 이치를 따져 그 의미를 깨우쳐 나가는 禪을 말하는데,바람직하지 않다 하여 사구선(死句禪)이라고 한다.'여래선(如來禪)'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禪定(Samadhi)을 닦는 禪을 말하지만,말과 이치를 넘어섯다 하여 수행자 사이에 최고로는 쳐주지 않는다.'조사선(祖師禪)'은 일반적으로는 혜능(慧能)과 그의 직제자들이로 이어지는 선법(禪法)을 말하지만,보통 스승이 제자의 근기(根器)를 보아가며 문득 일러주는 공부법이다.특별한 조건(禪定)을 강요하지 않으며, "평상심(平常心)이 道"라는 말처럼 일상생활에서 경험되는 근원적인 마음(自性)을 발현시킨다.선도仙道는 단전(丹田)을 이용해 입정(入靜)한다.통기(通氣)와 축기(蓄氣)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조사선의 기법을 많이 채용한다.

무아(無我)를 말하지 말라.보이면 보고, 들리면 듣는 이 놈이 ...내가 아니면 무엇이 나란 말인가?무아는 허상(虛想)이다. 무아가 각인(刻印)되면 대혼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실감(實感)이 없는 논리만의 깨달음은 힘이 없다.'탁'하고 내려치면 '아'하고 알아채는 그것!무아는 나중에 거론하도록 하자.보고, 듣고, 알아채는 이것의 중심을 깨우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끝까지 의심하라.이것 말고 또 다른 나의 실체가 어디에 또 있는지...

단전호흡을 하려면 먼저 단전(丹田)을 깨어나게 해야 합니다. 복식호흡을 단전호흡이라 해서는 안 됩니다. 丹田없는 선도(仙道)는 선도가 아닙니다. 당신이 40세라면 당신의 丹田은 가동되지 못한지 40년 된 것입니다. 상당한 각오가 없이 丹田은 열려주지 않습니다.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론 헛수고입니다. 전심전력을 한다면 6개월 정도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단전이 열리면 몸과 마음에도 힘이 붙습니다. 쓸데없는 번뇌 망상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사는 것 같이 살게 됩니다. 집중력이 크게 향상됩니다. 에너지(氣) 운용이 한결 수월해집니다. 견성(見性)과 소주천(小周天)이 눈 앞에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