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5)
谷神不死
자기가 체험한 것과 동일한 체험이 없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고난의 역정(歷程)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진실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가르침도 있습니다.깊은 삼매(Samadhi)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역사이래 수없이 강조되었던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런 주장들이 수많은 계파를 만들었고, 따르는 수행자들을 더 어렵게 하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합니다. 단언컨대 깨달음의 체험은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말입니다.깨달음은 찾아 얻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위한 길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그것이 그리도 찾기 어려운 것은 누구에게나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至道無難唯嫌揀擇 우리가 어딘가를 찾아가려 할 때 출발지..
수행을 한다면서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창밖의 풍경이나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정신 팔려 오늘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은 이들은 정작 중요한 일은 뒤로 미룬 채, 우선 보기 좋고, 듣기 좋은 일에 시간 대부분을 쓰고 삽니다. 중요한 것은 창밖의 풍경이나 자동차 소리가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고 듣고 있는 "나 자신"입니다. 경계(境界)를 쫓으면서 마치 깨달음에라도 한 발짝 다가선 듯 의기양양했던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고는 있는지요? 개는 흙덩이를 향해 달려가지만 사자는 흙덩이 던진 그놈을 무는 법입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란 세상살이 모두가 괴로움이란 말입니다. 즐거움이나 안락함도 무상(無常)하므로, 그 뒤에 괴로움을 깔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괴로울까요? 첫째,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자기를 모르면 허무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둘째, 나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기주의(利己主義)를 부르고, 외로움과 우울증의 원인이 됩니다. 셋째, 부정적인 생각(妄想)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의 정체성을 모르고 나와 대상이 어떤 연관 관계인지 無知한 데서 오는 소치이지만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를 깨우치는 것(見性) 하나로 모두 해소됩니다. 세상 모두는 하나같이 "나"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연기(緣起)라고도 불리는 모든 작용력의 원천입니다. 그것에 의해 "나"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만들고, 몸을 만들고, 세상만사를 만듭니다. "변한다"는 말은 "변치 않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변하고, 몸이 변하고, 세상이 변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지만, 그것이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마음먹게 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물속에, 불 속에, 흙 속에, 나무속에, 공기 속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자 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기, 생각하기를 잠시..
인생을 꿈과 같다고 합니다. 자기 챙김(自覺)을 "깨어있음"이라 하고, 외부(外部)의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어리석다" 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마가 8 : 18)'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곧 내려놓을 것(官)과 곧 두고 갈 것(財)을 탐하느라고, 그런 것들을 얻지 못할까, 행여나 얻은 것을 잃을까 걱정하느라고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생각을 내려놓는 것을 깨어있음이라 합니다. 그것은 自覺(깨달음)으로 연결됩니다. 세상에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없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소유할 수도, 누리지도 못합니다.내가 없으면 꿈도 없고, 세상도..
깨달음(見性)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굳이 '신심명(信心銘)'의 '도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를 들먹이지 않아도 말이다. 견성이란 자기의 本 마음, 순수의식(純粹意識)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사(祖師)들의 글을 읽고 그 가르침대로만 한다면, 누구나 통연명백(洞然明白) 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생각만 사라지게 하면 바로 깨닫는다. 생각이 끊긴 자리에 진면목(眞面目)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처나 조사들이 찾아온 구도자(求道者)를 바로 깨닫게 해주는 것(言下大悟)은 특이 공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자리를 정확하게 짚어 주었기 때문이다.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은 이야기를 어렵게 하지 않는다. 10살짜리도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어야 스승이다. 어린이도 동일한 불성(佛性)..
머리로만 대강 아는 것은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끓는 물에 손을 넣어 크게 고생해본 사람은 절대로 끓고 있는 물에 손을 넣지 않습니다. 단지 믿고 있다는 것 만으론 힘이 약합니다. 체험이 있어야 비로소 자기 것입니다. 술, 담배로 몸을 해치고 나서야 그것을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사람입니다. 재물과 권력을 탐하는 것이 고통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실감해본 사람은 거기서 물러나 비로소 "자기"를 위한 삶을 시작합니다. 小周天을 이루고 눈이 밝아져 神仙으로 살게 되기를 진실로 구하는 사람이나 자기의 관심사를 소주천으로 바꿉니다. 덜된 밥은 먹기 힘듭니다. 섣부른 알음알이는 오히려 자기를 더 해칩니다. 선배에게 자기를 내놓고 자주 점검받아야 합니다. 세상에 모르고 아는 척하는 것보다 더 큰 罪는 없습니다.
무엇이 보고 듣는가? 무엇이 세상을 끌고 가는가? 어두움이 없으면 밝음이 없고, 육근(六根), 육경(六境), 生死, 苦樂, 어리석음과 현명함도 모두가 반쪽짜리일 뿐이다. 생사고락 속에 홀로 밝으며,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인연(因緣)이 닥치면 에너지(氣)를 입고 드러난다. 늘 온전(穩全)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한 그것을 일컬어 "作用", 혹은 "하늘님"이라 부른다. 오직 그것만을 지키는 것, 그것이 一相三昧이다.
누진(漏盡)이란, 새어나감이 다했다는 뜻입니다. (새어나갈 漏, 다할 盡) 많은 사람이 漏盡通을 석가모니만이 지닌 특별한 神通力이라 오해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깨달음이 새어나간다고 하지만, 깨달음은 요지부동(不生不滅不來不去) 자리입니다. 그것은 에너지(氣)의 충실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에너지가 부족하면 병들고, 그것이 다하면 죽습니다. 에너지의 새어나감이 그친 것이 누진통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을 밝게 하여 영생불사를 이루는 母體입니다.
정부가 "투자를 해라", "일자리 늘려라" 한다고 기업이 말을 듣던가? 정관수술이 유행이더니 이제는 결혼, 출산이 愛國이란다. 그런다고 말 들을까? 이익만 눈에 보이면 "투자 자제하라" 해도 투자할 것이고, 결혼과 출산이 삶에 방해만 아니라면 저절로 될 일이다. 삼성과 LG가 명상센터를 만드는데 몇천억을 투자했단다. 명상센터가 부족해서일까? 기업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깨달으란 말, 氣를 알아야 한다는 말, 백만 번 해도 소용없다. 배고픈 사람만 밥을 찾기 마련인 법,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될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