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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이드(Id)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욕구의 충족을 위해 자기중심적, 비현실적, 비논리적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그것을 이드(Id, 原初我)라고 하며 에고의 일부분이다. 이드를 구성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식욕, 목마름, 성욕의 세 가지이다. 이드의 필요가 발생했을 때, 개체는 즉각적인 만족을 요구하게 되며 따라서 이드는 쾌락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본적인 예로 어린 아기는 배가 고플 때 젖 먹기를 원하며 주변의 상황이나 형편 등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리비도(Libido)라 불리는 성욕을 추구하는 에너지가 내재(內在)되어 있다. 자아(ego) ‘나’를 구성하는 중심 인격이다. 태어난 뒤 현실 환경 속에서 이드로부터 분화되면서 발달하며, ..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시타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아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참고적으로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의아하겠지만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주었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주장한다.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에고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글을 보면 발끈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자아가 없는지 왜 자아를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
무아(無我)와 자아(自我)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존재(存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나’는 실재한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왜 ‘나’ 말고 진아(眞我)라는 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것으론 부족한가? 지금 이 ‘나’는 허깨비인가? 아니면 없애야 할 대상인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여기 ‘나’는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지 않은가? 인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싯다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자아(에고; ego)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 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참고로,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답답하겠지만, 자아(에고)란 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중도적(中道的)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주었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주장한다. 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에고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자..
사람은 누구나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기를 우선 배려하는 사람을 가리켜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을 때, 과연 나는 그럴만한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남을 우선 배려하며 살고 있는지를 자기(ego)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 자기는 미뤄두고, 진정 상대 우선으로 사는 대의(大義)를 우선시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인(君子)'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어쭙잖게 대인(大人)인 척하는 그것이 자기가 소인배라는 것을 탄로 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인 소리를 들으려면, 우선 에고(ego)가 무엇인지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에고가 무언지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대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에고이스트(egoist)로 살아보라 권한다. 그 말은 남을 ..
'무아(無我)'란 있어 보이는 말인 듯 해도, 내가 없으면 먹을 수도, 잠잘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내가 없으면 알아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엄연히 실재(實在)하고 영원한 존재다. 고정되어 있지 못하다고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다. 몸과 마음은 나는 아니지만 그것들의 변화를 알고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는 놈이 있다. 그것이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자아(自我)이다.
내가 없으면, 먹을 수도, 잠잘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없으면, 알아챌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실재(實在)하지만, 고정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합니다. 고정되지 못한다고 하여, 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알아채야 합니다. 나를 알아챈 것을 가리켜 깨달았다 합니다.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하지만 몸의 변화를 알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는 '그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자아(自我)입니다.
'나'는 물과 같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존재한다. 고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낀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보고, 듣고, 느끼는 자는 있다. 그릇이 없이 물을 담을 수는 없다. 깨달을 것은 없다고? 그럼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한다. 내가 없다면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나는 물처럼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엄연히 존재한다. 봄이 있음은 보는 자가 있는 것이요, 들음이 있음은 듣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 비행기 지나간 흔적이 있다는 것은 배와 비행기가 있다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물처럼 모양은 없어도, 엄연히 있다.
에고(自我; ego)를 부정하는 사람처럼 egotistic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에고와 자기를 구별하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에고를 부정하지 말라. 에고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自己)를 부정하는 것이다. 에고를 죽인다고 협박하지 말라. 에고는 당신이 죽기 전까진 죽지 않는다. 혹시 당신이 죽어도 에고는 살아남을지 모른다. 에고란 우리말로 하면 자아(自我)이다.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없다’는 자가당착에 빠지지 말라. 내가 곧 에고이기 때문이다. 에고를 잘 살피며 사는 사람, 그야말로 깨달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아집(我執)이 하늘을 찌를지라도 자아(自我)를 알고 스스로 집착을 다스릴 수 있다면 장자(長子)라 불러 마땅하고, 山같이 재산(財産)을 모으고 비길 수 없는 권세(權勢)를 가졌더라도 재물이 만인(萬人)을 위해 사용되고 자리에서 물러날 때를 안다면 군자(君子)라 아니할 수 없다. 재산과 권세가 없어도 자기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다면 일품 벼슬이 부럽지 않고, 단칸방에 반찬 두 가지 상차림이라도 지족(知足)하고 산다면 무엇이 부러울 것이며, 늘상 본래의 자리를 챙기며 무학(無學)으로 사는 사람은 옥황상제 앞에서도 당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