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일상 속 바라봄 (611)
谷神不死
見性이 없는 가운데 진행하는 수련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견성은 단지 자기를 보는 것에 불과한 것이어서, 어린이든 노인이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뜻을 이룰 수 있다. 어떠한 지적(知的) 준비도 미리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알음알이 없이 무식하게 들이대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먼저 見性부터 해야한다. 견성을 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세상살기가 훨씬 편해진다. 깨달음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두 가지를 알게 된다. 하나는 생각이 피어나는 마당, 시간이 끊어진 텅빈 공간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알아채고 있는 묘한 존재감이다. 두 가지 모두 알고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
나는 누구인가? "라마나 마하리쉬"가 존경받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심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누구의 자손이고, 이름은 김아무개고, 한국에 살고 있고, 모모 대학의 교수이고...神의 피조물이거나 원숭이의 진화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스스로 '깨달은 자'임을 자처하며, "너는 누구냐?"의 질문과 답을 준비한 후 사람들을 희롱하는 것을 재미로 삼으며 사는 주제넘은 인사도 있다. 세상에 "나는 누구?"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할 사람은 없다.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언어를 떠난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선사(禪師)들이 "동산수상행"이니, "뜰앞 잣나무"니, "삼서근", "차나 한잔 하시게"하는 힌트로 ..
다수의 사람이 믿고 있는 것들... 긴 세월 변함없이 믿어왔다는 것들... 논리의 앞뒤가 딱딱맞아 이론(異論)이 전혀 불가능한 것들... 믿을 만한 출처로부터 온 정보들... '그것만은 변함없이 옳은거야'라고 평생 배우고 익힌 지식들... 경전의 말,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선지자의 말들까지... 모두 모두 '아니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것이 있다면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究竟)이다'라고는 결코 말하지 말라.
평화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평화는 말로 가져올 수 없고, 비둘기가 가져오지 않으며, 이상(理想)이나 신앙이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평화는 결코 혼자 올 수 없다. 평화는 언제나 질시, 반목, 다툼, 戰爭과 함께 온다. 전쟁과 평화는 둘이 아니다. 평화가 오면 전쟁이 그 뒤를 따르고, 전쟁이 지속되면 평화가 그 뒤를 잇는 것이 이치다. 인간은 지루한걸 못참는다. 평화가 길어지면 심심해져 게임으로라도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평화를 지킨다며 굶어도 무기를 비축하는 것이 사람이고, 상대국이 나와 대등한 무기를 가지면 전쟁을 해야하는 것이 사람이다.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없애 버려야 한다. 평화는 전쟁의 먹이다. 먹이가 사라지면 전쟁은 죽는다. 또한 전쟁이 죽으..
우리는 속고 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 수밖에 없고 누구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관념의 노예로 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은 인간이 만든 희대의 속임수라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에 기만당하고 있다. 우리는 편의상 지구의 자전(自轉)을 24시간으로 나누었고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도는 것을 1년이라 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우리의 목숨까지 연계시켰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지구의 자전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태양계를 벗어난다면 시간은 정지하거나 역행하게 된다. 그것은 실제로 가능하다. 참조(필견) : https://www.youtube.com/watch?v=kVCOVtXsyXI https://www.youtube.com/watch?v=GRhzKb3aYfM 그렇다면 지금이라..
최근 우리 사회에는 법원의 구속영장기각과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무죄선고로 왈가왈부가 있다. 결국 양심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여기서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양심(良心)은 다분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양심은 스스로 자기 행위에 대한 평가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아울러 양(良)이란 말은 편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어서 의무와 연관되어 있을 때는 그 부여자가 누구(?)이던 간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편해지고 거부할 때는 불편해지는 것이다. 각자의 양심은 거의 모두 교육에 의해 형성되므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한다. 결코 불변하는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결국 판사에게는 판사의 양심이, 검사에게는 검사의 양심이, 사제에게는 사제의 양심이, 전사(戰士)에게는 전사의 양심(승리)이 있으며, 기독교인에게는..
동서고금을 통해서 '정의(正義)'처럼 아무의 입을 통해 값싸게 표현된 말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한국사람들에게는 '정의'에 대한 관심이 유별난가보다. 미국선 10만부 팔렸다는 미국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에서는 100만부 이상이 팔렸다니 말이다. 그 책을 읽어보면 정의에 대해 변죽만 올릴 뿐, 실제 정의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있다. 작가를 이해한다. 왜냐면 '정의'란 주제는 말로나 글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생각이 끊어져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공의(公義)'라는 말과 '정의'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나, '공의'란 말은 신(일부 神)에게나 적용하는 말로서 우리가 왈가왈부할 꺼리가 못된다..
스승이 없는 사람은 나침판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다. 스승과 선생을 혼동하지 말라. 그 차이는 친구와 아는 사람의 간격보다도 더 크다. 나와 생사를 같이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친구가 아니며, 그냥 지인일 뿐이다. 좀 확실히 말하면, 내 보증을 서주는데 망설이는 사람은 단지 아는 사람일 뿐이다. 첫째, 스승은 애인 같아야 한다. 아침에 제일 먼저 생각나고, 잠들기 전에 떠오르는 사람, 좋은 경치를 보면 데려오고 싶고, 맛난 음식이 있으면 먹여주고 싶고, 좋은 것이 있으면 모두 사주고 싶고, 마냥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 내 소유 모두를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나와 존재를 함께하는 영혼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케미(chemi)가 맞아야 한다. 제아무리 박식하고 능력이 출충해도..
깨달음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정말 무아(無我)가 맞다면, 도대체 누가 깨닫는단 말인가? 종내 깨달을 사람이 없다면 깨달음은 무엇을 의존하여 있단 말인가?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산이 산인 줄 알고 물이 물인 줄 아는 것이 깨달음인가? 알고 보니 ‘그것’이 ‘그것’인 것을 가지고 그리도 법석을 떨었단 말인가? 바람 부는 날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현관문 열고 마당으로 나간 적이 있다. 분명 인기척을 느겼고 문 흔드는 소리도 분명했는데 문밖에서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 멍하게 서있었는데 그것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까? 깨달음이란 그저 편안함을 회복한 것이 아닐까? 이미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얻었다 할 수 있을 까? 착각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닌가? 갈아입을 여름 옷 주머니에 손을 넣으..
사람들은 왜 재물을 모으려 하고, 더 높은 권력을 얻으려 할까? 왜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산을 정복하려 하고, 생명을 건 북극점 탐험을 감행하려 할까? 그것의 진정한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마음을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권리이다. 우리 모두는 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세상은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리, 소유, 그리고 그 밖의 것들 모두가 걱정거리다. 소유가 많을수록 불안은 더 커진다. 불안은 우리의 삶을 헤쳐 놓는다. 더구나 왜 불안한지 그 이유를 모를 때 우리 불안감은 점점 더 자라난다. 술, 담배, 약물, 그리고 섹스는 불안 해소를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불안을 가라앉히지는 못한다. 전혀 과녁이 빗나갔기 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