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66)
谷神不死
"나"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수행자가 제일 먼저 가려내야 할 화두(話頭)다. 모든 것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나'이기 때문이다. 불문(佛門)에서 ‘나’라는 것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은 열심히 '내가 없다(無我)'는 것을 말하고, 심지어는 최면을 걸어서까지 자기가 없다는 것을 마음에 심으라고 역설한다. 그렇게 하는 근거로는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을 '나'로 규정하고 오온 중 어떤 것에도 주체(主體)가 없다는 것을 들이댄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다 보면 일견(一見) 일리(一利)가 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으나, 과연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오온이 모두인가에 다다른다면 의문이 그치질 않는다. 선도(仙道)에서의 사람 구성요소에는 오온(五蘊) 외에 기(氣)와 신(神)이 있으며, Bible에도 코에 ..
자기를 지켜보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에게 퇴마(천도 의식)는 무용하다. 귀신이란 것이 허망한 것이고,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작용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주인임을 잊지 않는 사람에게 퇴마(천도 의식)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하지만 심약한 사람, 심지(心志)가 흔들리는 사람,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런 의식이 더러 필요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상태가 깊어질 것이고, 결국은 폐인이 되고 말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빙의라고 해서 꼭 외부로부터 온 어떤 영적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속에 이미 여러 인격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 중 하나가 주도권을 가지는 것을 내빙의(內憑依)라고 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편의상 우리 삶에 문제를 일으키는 빙의(憑依)만을 빙의라 하기로 한다. 빙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신(神)에 의한 빙의이고, 하나는 외부 귀신에 의한 것이다. 내부의 신에 의한 빙의는 설득이나 약간의 푸닥거리로도 퇴치가 가능하지만, 외부 귀신이 들린 것이라면 웬만한 수단으로는 퇴치가 쉽지 않다. * * * 빙의는 보통 신경쇠약, 조울증, 조현병, ADHD를 앞장세운다. 빙의에도 저급 귀신의 빙의와 고급 귀신의 빙의가 있다. 저급의 귀신은 자신과 타인에게 소소한 어려움을 주지만, 고급의 귀신은 다르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 이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억압이나 파괴 등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또한 결정적 순간이 아니면 빙의 상태를 잘 드러내지 않고, ..
자기를 둘로 나누지 말라. 나라는 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에너지(氣)의 종합체이다. 그중 하나만 부실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참나'라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마치 토끼 뿔, 거북이 털을 찾는 것과 같다. '참나'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에고(ego)를 버려야 한다, 심지어 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다.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에고는 나 자신, 즉 자아(自我)이기 때문이다. '참나'라는 조작된 것에 속지 말고, 에고를 죽이려 하지 말라.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바로 에고이기 때문이다. '참나'와 '에고'는 둘이 아니다. 에고는 버리거나 죽일 대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에고(Superego)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기만 하면 되는..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산다. 상사는 도(道)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중사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하사는 도를 들으면 비웃는다. 반신반의하거나 비웃음이 없는 도는 도가 아니다. 노자(老子)의 말이다. 1. 돈과 권력, 명예를 좇으며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세상 사람의 99%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 이른바 하사(下士)다. 2. 무상( 無常)함을 깨우쳐 삶의 일체가 고통임을 알아채 세상과 유리된 삶을 사는 수행자를 자처하는 사람. 무아(無我)까지 깨우쳐 윤회를 넘어 이번 생을 마치면 다시는 세상에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염세적(厭世的)인 1%의 사람이 있다. 혹시 그런 사람이라면 중사(中士)다. 3. 희귀하기는 해도, 도(道)를 좇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도와 합일한 사람, 1%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기를 우선 배려하는 사람을 가리켜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을 때, 과연 나는 그럴만한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남을 우선 배려하며 살고 있는지를 자기(ego)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 자기는 미뤄두고, 진정 상대 우선으로 사는 대의(大義)를 우선시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인(君子)'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어쭙잖게 대인(大人)인 척하는 그것이 자기가 소인배라는 것을 탄로 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인 소리를 들으려면, 우선 에고(ego)가 무엇인지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에고가 무언지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대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에고이스트(egoist)로 살아보라 권한다. 그 말은 남을 ..
'무아(無我)'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다. 자기를 아는 사람을 가리켜 지성인(知性人)이라 한다. '나'는 정기신(精氣神), 즉 육체와 에너지(氣) 그리고 정신(의식)으로 구성된 종합체이며, 쉼 없이 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며,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나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없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표할 만한 것은 '의식(意識)'이다. 어떤 의식을 가졌느냐가 나의 가치이며, 그것이 우리가 공부해야 하고, 깨우침을 얻어야 할 이유다. 의식은 공부량에 따라 진보하며 영원한 존재다. 그것은 육체가 흩어져도 에너지가 끊겨도 없어지지 않는다. 살아서 몸과 에너지를 어떻게 관리했느냐에 따라 사후의 나는 다른 존재가 되..
체질을 바꿔라. 너무 둔감한 사람, 감정이 메마른 사람, 의심이 많은 사람, 부정적이고 패배 의식이 강한 사람은 깨달음도, 소주천도 어렵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고, 자주 자연을 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정(情)을 나누고, 호흡 명상과 함께 기공(氣功)을 배워라. 더 큰 진보를 원한다면 태극권을 배워라. 싸우는 태극권 말고, 氣를 살아나게 하고 통기를 시켜주는 태극권이어야 한다. 선도연맹은 양가의 적통 태극권을 가르친다.
깨달음이란 즉시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단지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입니다. 교리(敎理)가 아니며, 배우거나 믿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깨달음은 멀어집니다. 학문으로 덮으려 하기 때문에 내가 점점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리를 틀고 앉을 필요도 없고, 가족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을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바로 '나'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무아(無我)도 아니고, 참나(眞我)도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아(無我)니, 진아(眞我)니, 따지는 것부터 깨닫기 싫은 핑계입니다. 깨달음을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자기를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으며, 만났다..
세상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과, 의심으로 구원받는 사람,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필자는 이중인격자이다. 그는 믿음과 의심을 반반씩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온전한 신앙인이 되지 못했고, 시한부 종말론을 거부했다. 신앙인에게 의심은 금물이다. 신앙인에게 교리를 따지지 말라. 그들에겐 절대적 믿음, "믿습니다, 아멘"만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동기부여는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요한의 침례 의식 중, 요단강 위에 나타난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통해 자신이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했다. 열려있다고 알려진 김기석 목사를 만나, "어떻게 하면 믿음을 키울 수 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