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66)
谷神不死
붓다는 자기를 깨우친 사람이고,신선(神仙)은 생사(生死)를 넘어선 사람이다.붓다는 자기 없음(無我)을 알아챈 사람이고,신선은 자기의 한계를 넓힌 사람이다.붓다에게는 세상 삶의 일체가 고통(一切皆苦)이고, 신선에겐 고(苦)와 낙(樂)이 하나로 다가온다.모든 것은 자기 선택에 달려있다. 어떤 인연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붓다도 되고, 신선도 되어지는 것이다.
모든 일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꺼진다. 조건이 있으면 있고(살고), 조건이 없으면 없다(죽는다). '연기(緣起)'를 말한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기운이 잘 통하고 실(實)하면 건강하고, 기운이 불통(不通)하고 부실(不實)하면 병들고 죽는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氣)이며, 인간 생명은 에너지와 의식의 콜라보(collaboration)에 의해 유지된다.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살아선 정기신(精氣神)의 조화요, 죽어선 에너지(氣)와 의식(神)을 어찌 계합(契合)하고 운영하느냐이다. 세상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유지되고, 쇠퇴한다.
왜 괴로울까요? 외롭고, 쓸쓸하고, 불안하고, 두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을 모르는 한, 죽을 때까지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견해(見解)와 사유(思惟)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공부가 필요합니다. 듣거나 읽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공부가 아닙니다. 이제 그런 것은 기계(AI)에 맡겨도 됩니다. 진정한 공부란 기존의 "나"를 내려놓고, 바른 견해, 바른 사유를 가질 수 있는 새로운 "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백만 권의 책을 읽어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누군지부터 알아채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공부는 세상에 없습니다.
숨과 에너지(氣)를 구별하라.숨이 일개 하인이라면, 에너지는 돈이다.우리는 돈으로 하인을 부린다.하지만 하인들은 조건이 맞을 때만 순복(順服)한다. 가장 손쉽게 에너지를 알아채게 하는 것은 숨이지만 에너지는 우주에 가득하다.숨이 가치가 있는 것은 이 몸을 유지 관리하는 첫 번째 하인이기 때문이다.이 몸과 헤어질 때 에너지는 챙겨가라.이사 갈 때 소중한 것들은 챙겨가듯이...이 몸과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다..집 떠나면 당장 필요한 것이 돈이다.황급히 떠나느라 빈손으로 떠나지는 말라.돈을 가져야 어딜 가도 대접받는다.돈을 창고 깊숙이 감추어 두지 말라.떠날 때 즉시 챙길 수 있도록...돈은 집안에만 보관하지 말고, 90%는 은행에 맡겨두라.집이 무너지고 불탈 때 함께 사라지지 않도록...무엇이 집이고, ..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시타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아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참고적으로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의아하겠지만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주었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주장한다.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에고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글을 보면 발끈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자아가 없는지 왜 자아를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
함부로 자타일여(自他一如)를 말하지 마십시오.그러다 큰코다칩니다.잠시 상대와 내가 하나로 느껴졌다고 '우리는 하나다'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저의를 의심받게 됩니다.'나는 우주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세요.남들은 정신 나갔다고 생각합니다.먼저 '그 자리'를 찾도록 하십시오.그리고 그 자리에 안주하십시오.그 자리엔 같은 것도 다른 것도,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우주도 하느님도 없습니다.그 속에 살지 못하는 한,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그 속에 살고 있어도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싯다르타는 명쾌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성이다. 그는 무상, 고, 무아라는 간단한 이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무상(無常)이 고(苦)를 낳지만, 무아(無我)라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너무 복잡하다. 파벌도 파벌이지만, 가르침도 상이하다. 간단히 無我라 알고 살면 쉬울 것을, 힌두로부터 진아(아트만)와 윤회를 끌어들인 것으로 부족해,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에 요가로부터 유식학(唯識學)까지 가져왔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미궁(迷宮) 속에서 쉼 없이 허덕일 것인가라는 기로(岐路)에 서야 한다. 진리는 쉽고도 명료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수행을 하는 중에 더러 뻥 뚫린 허공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다. 한마디로 체험은 체험일 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함부로 전체 의식을 들먹이지 말라. 그것은 삼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며, 의식(意識)을 지니고 있는 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잠시 멍한 상태에 있었다고 전체 의식을 체험했다고 하지 말라. 단지 멍때리고 있었을 뿐이다. 먼저 에고를 알아차려라. 그것이 자기를 아는 첩경이다. 남의 목장 소가 몇 마리인지 세지 말라. 우리 안에 있는 내 소에 정성을 들여라. 남의 목장 소만 넋 놓고 보고 있다가 내 소가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 에고에 집중하라. 그것이 에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전체 의식은 연신환허(鍊神還虛), 즉 神 공부가 마무리된 연후에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주시(注視)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그곳으로 옮겨간다. 그다음은 마음의 방향성인데, 시각화(視覺化)가 그 일을 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 따라 우리의 삶은 변해간다. 가급적 원치 않는 것, 피하고 싶은 것을 시각화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쥐를 박멸해야 해'라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쥐를 떠올린다. 그 습관을 극복하지 멋하는한 우리는 쥐와 함께 ㅅ살 수빆에 앖다. 생각에는 일어나는 생각과 일으키는 생각이 있다. 일어나는 생각들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 아니면 남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일으키는 생각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 의수단전(意守丹田)은 생각 조절 훈련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Energetic한 삶은 물론, 시각화를..
인간에겐 두 개의 에너지(氣) 루트가 있다. 그 하나는 심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하나는 단전(丹田)이 중심이다. 기운에는 선천지기와 후천지기가 있는데, 심장은 후천지기(後天之氣)를 움직이는 센터가 되고, 선천지기(先天之氣)는 하단전(下丹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생명은 하단전에서 시작하고, 태어나 폐로 호흡이 옮겨가면서 기운의 중심이 심장으로 옮겨가는데, 그때부터는 후천지기가 에너지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에너지의 원동력은 언제나 하단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선도를 닦으려면 먼저 하단전부터 활성화시켜야 한다. 수행이란 선천지기를 회복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단전호흡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생명의 근원 자리인 본래면목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른 소주천을 위해서는 단전의 재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