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75)
谷神不死
깨달음 인가를 받았는데 아직도 무언가 마음의 끄달림이 남아 있다면 재검(再檢)이 필요하다. 認可를 받았는데 건강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깨닫기 전에도, 후에도, 변함없이 외롭고 우울하고 두려움 역시 그대로라면, 그것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까? 밥을 먹으면 배가 불러야 하고, 목욕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해져야 하며, 사업이 성공을 거두면 살림살이의 質이 달라져야 한다. 밥을 먹어도, 목욕을 해도, 사업이 성공을 거두어도 변한 것이 없이 옛날 그대로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붓다는 見性과 대자유를 말했고, 예수는 구원과 永生을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말로만 그치고 현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그런 견성, 그런 구원은 "글쎄요?" 해야 하지 않을까? 깨달음을 얻었다면..
장자(莊子)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날고 있는 꿈을 꾸었단다. 꿈에서 깨어난 장자는 고민에 잠겼다지?"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가?" 꿈은 종잡을 수 없다. 꿈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모두 내 의식의 발현이다. 꿈은 나 혼자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연출자도 나이고, 등장인물은 물론 그 속에 소품들도 모두가 나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꼬집으니 아픈 감각 이것들은 모두 실제가 틀림없는가? 역시 내 의식의 발현이 아니던가? 언젠가는 깨어나고 말 테니까... 그것 역시 허망한 꿈이 아닐까? 지금 당장 꿈에서 깨어나 관객이 되는 것, 그것이 깨달음, 見性이다. 영화 하나가 끝나면 관객은 집에 가 샤워하고 맥주 한잔 마시고는 침대로 ..
남의 집 자식이 아무리 잘났으면 무엇하나?좀 덜 예뻐도 내 자식만 할까? 道의 이야기를 읽고 이해가 되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자기 스스로 그 지리에 들어앉지 못한다면 모두가 그림의 떡이다. 공부하지 않는 이유 중 으뜸은 아직은 더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겐 내일은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 내일이란 꿈속의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내일이다. 아무리 깨달음에 관한 글을 많이 읽어도 별 소용이 없다. 그것은 남의 밥상을 구경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 한 숟갈이라도 내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듯, 하루 5분이라도 자기 공부가 없으면 道通 길은 열리지 않는다. 읽고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힘들어도 발품을 팔아야 한다. 찾으려 하기만 하면 깨우..
영사기가 빈 필름(film)을 비추면 하얀 스크린(screen)만 나타나듯이 생각이 멈추면 눈앞에 분간키 어려운 텅 비어있음이 드러난다. 영상이 시작되면 스크린은 어김없이 형상을 표현하듯이 생각이 작동되면 텅 빈 자리는 다시 생각들로 채워진다. 영상은 변해도 스크린은 변함이 없듯이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져도 그 자리만은 언제나 如如하다. 그 자리가 바로 자각(自覺)의 자리,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 자리를 체험하며 살지만, 사람들은 관심 없이 흘려버린다. 그 자리가 바로 만물(萬象)을 만들어내고 꺼지게 하는 존재(存在)의 표상(表象)이요, 깨달음의 자리, 성령(聖靈)이 임하는 자리라는 것을 모르고 흘려버린다. 관상(觀想), 기도, 묵조선(默照禪)이..
그 일은 저절로 일어났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끝도 없는 空間이 멀리멀리 펼쳐졌고 오직 큰 눈만 생생히 남아 있었다. 예전에도 가끔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정도였다. 한참을 그러고 나선 마음이 힘을 잃은 듯 세상사 모든 것들의 意味가 희미해졌다. 기억력도 감퇴했는지 금방 생각했던 것들이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이해력은 한 단계 높아진 듯 했다. 전에는 갈피를 못 잡던 善知識의 말들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보고 들리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모두 "그것"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동굴 속에 등불이 켜진 것 같았다. 氣의 運行도 한 단계 승급된 듯했다. 소주천을 이루고 난 후 仙道의 중심에 들었다고 생각은 했으나 무언가 시원치 않고 미흡했었던 게 사..
깨달음을 얻은 후 너무 소중해서 혼자만 간직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회를 만들어 남에게 전해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있다. 앞의 것을 功이라 하고 뒤의 것을 德이라 한다. 功은 스스로의 만족에서 그치지만, 德은 모두 함께해야 만족한다. 德을 베푸는 것이 단연 한 수 위다. 德을 베풀면 功은 저절로 닦아지기 때문이다.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더러는 비웃는 사람도 만나지만, 그는 개의하지 않는다. 功은 안일(安逸)한 세상을 살게 하지만, 德은 平安과 함께 원하든 원하지 않든 世世토록 福을 가져온다.
통(通)한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모두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道를 通하면 홀가분함을 얻는다. 하늘 땅, 나와 너, 善과 惡이 모두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있어서 하늘 땅이 있고, 善惡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한통속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길, 진리, 생명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理와 氣이며, 性이며, 命이고, 갈등과 편견이다. 그것들은 모두 道와 하나로 뭉쳐 있다. 道와 떨어져 있다는 그 생각마저도 바로 道이기 때문이다. 道를 通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더 이상 가져야 할 것, 되어야 할 것,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다. 그것들 모두가 道의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행은 道와 따로 떨어져 있다는 그릇된 생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道通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견문각지 두두물물(見聞覺知 頭頭物物)이 모두 그 자리였는데, 그것을 모르고 몇십 년을 찾아 헤맸다니... 똑똑함의 기준은 암기력, 분석력이지만, 깨우침에는 그것이 장애가 된다. 그래서 학식 높은 사람, 수행 많이 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것이다.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 되어야 편안하다. 사리 분별에 아주 능숙하다.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에게, 분별치 말고 아이처럼 듣고 보라 하니, 어떻게 진도가 나갈 수 있겠는가? 이해가 어려운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늘은 공평하다. 똑똑한 사람에겐 다른 차원의 고생을 시킨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입에 단내가 나게 한다. 그러다 지칠 대로 지쳐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性은 다분히 관념적이며, 命은 보고, 듣고, 느끼는 점에 실체성을 지닌다. 성과 명은 분리할 수 없는 緣起로 되어 있어, 한쪽이 있어야 다른 쪽도 존재하는 구조다. 性은 存在라는 알 수 없는 막연성에 근거하지만, 에너지(氣) 덩어리인 命은 매우 구체성이 있어서 性은 필히 命을 얻어야 행세를 한다. 명이 다하면 성도 존재할 수 없게 되어 시타르타의 주장처럼 인간은 無我일 수밖에 없지만, 다시 命을 얻는 순간 '나'라는 독립된 개체가 재탄생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는 말이 있다. 고통(苦)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재를 뿌리부터 영구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생각(無餘涅槃)은 근심 걱정을 영원히 사라지게 한다는 시원함도 있겠으나, 한편으론 사람들을 허무주의(虛無主義)로 흐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안..
명상(冥想)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별의별 명상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그것을 하면 원하는 것을 얻고 병(病)도 고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명상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미룬 명상은 단지 모양일 뿐, 우리에게 근본적인 행복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 즉 자각(自覺)이다. 바로 명상을 하는 당체가 "누구인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자각(自覺) 없이 테크닉만으로 명상을 시도한다는 것은, 청소를 하지 않고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요, 기초공사 없이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명상은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그것으로 무언가를 얻고 공명(功名)을 얻으면 무엇에 쓸 것인가? 내가 누구인가를 깨우치고 나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