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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자기가 누군지를 알려면 먼저 자기(에고)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거기에는 신앙(信仰)도, 교리(敎理)도 필요 없습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기를 덤덤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아! 이것이 나의 본모습이구나" 할 때, 거기에 만족함이나 불만, 뿌듯하거나 우울함이 조금이라도 실려있다면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십시오. 그것은 본래 모습이 아닌 에고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혹시 시기하는 마음이나 노여운 감정이 살아있다면 한 발 더 물러나야 합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적적(寂寂)함만이 지속된다면 일단계는 통과입니다.무사인(無事人)이 된 겁니다. 그다음에 할 일은 그저 지켜보고, 지켜보고, 지켜보기 뿐입니다.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싯다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아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 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답답하겠지만, 자아란 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중도적(中道的)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주었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주장한다.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필자가 쓴 "에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글을 보면 발끈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참나’와 에고는 동거(同居)한다.하나가 다른 하나를 싫다고 내쫓을 수 없다. 새로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해서 먼저 살던 집에 불을 질러서는 안 된다.그것처럼 무책임한 일도 없다. 그리하면 그날부터 남의 집에서 잠을 자야 할 판이니 말이다. 입주(入住)하기 전까지는 살던 집에 살면서짬짬이 새로 산 아파트의 인테리어 공사를 해야 한다. 나는 칠 평생 ‘참나’로만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그런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無餘涅槃)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라.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이슬람이든, 우리 모두는 ‘참나’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그때까지는 ‘에고’를 화나게 하지 말고 잘 구슬리며 지내야 한다. ‘참나’와 에고는 동거(同居)하고 있으며,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에고가 하고 있..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시타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아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참고적으로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의아하겠지만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주었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주장한다.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에고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글을 보면 발끈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자아가 없는지 왜 자아를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싯다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자아(에고; ego)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 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참고로,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답답하겠지만, 자아(에고)란 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중도적(中道的)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주었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주장한다. 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에고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자..

자기를 둘로 나누지 말라. 나라는 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에너지(氣)의 종합체이다. 그중 하나만 부실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참나'라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마치 토끼 뿔, 거북이 털을 찾는 것과 같다. '참나'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에고(ego)를 버려야 한다, 심지어 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다.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에고는 나 자신, 즉 자아(自我)이기 때문이다. '참나'라는 조작된 것에 속지 말고, 에고를 죽이려 하지 말라.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바로 에고이기 때문이다. '참나'와 '에고'는 둘이 아니다. 에고는 버리거나 죽일 대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에고(Superego)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기만 하면 되는..

사람은 누구나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기를 우선 배려하는 사람을 가리켜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을 때, 과연 나는 그럴만한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남을 우선 배려하며 살고 있는지를 자기(ego)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 자기는 미뤄두고, 진정 상대 우선으로 사는 대의(大義)를 우선시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인(君子)'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어쭙잖게 대인(大人)인 척하는 그것이 자기가 소인배라는 것을 탄로 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인 소리를 들으려면, 우선 에고(ego)가 무엇인지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에고가 무언지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대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에고이스트(egoist)로 살아보라 권한다. 그 말은 남을 ..

자아 발견은 자기 자신의 상태와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이상이 무엇인지를 알면서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환경과 조건에 처해 있으며,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갈지를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자아실현이란 자기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 자아실현은 시대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져왔고, 각기 사상마다 다양하게 자아실현의 과정들을 제시해 왔다. 현대 사회에서 자아실현의 의미는 인간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늘 변화하며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존재라고 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창조적이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 존재로 인식한다. -위의 글은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2007.12.15. 한림학사)을 정리한 것이다-..

에고(自我; ego)를 부정하는 사람처럼 egotistic한 사람은 없다.그들은 에고와 자기를 구별하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에고를 부정하지 말라.에고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自己)를 부정하는 것이다. 에고를 죽인다고 협박하지 말라.에고는 당신이 죽기 전까진 죽지 않는다.혹시 당신이 죽어도 에고는 살아남을지 모른다. 에고란 우리말로 하면 자아(自我)이다.어디선가 얻어온 ‘내가 없다’는 자가당착에 빠지지 말라.내가 곧 에고이기 때문이다. 에고를 잘 살피며 사는 사람,그야말로 깨달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생각을 내려놓는 것, 분별하지 않음(唯嫌揀擇), 이 두 가지가 깨우침의 직코스이다. 스승들은 에고를 내려놓으라 한다. 에고는 생각이고, 좋다-나쁘다를 분별하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Epoche(판단정지)란 에고를 물러서게 하는 것이며, 그 자리엔 자각(自覺)만 남게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가? 에고에 매달리지 말라. 에고가 없어도 나(自覺)는 존재하지만, 내가 없으면 에고도 없다. 에고가 없이 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단지 진여(眞如)의 그림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