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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힌두교와 불교(佛敎)는 '나'라고 하는 영구적 실체(實體)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이 가능하다. 깨우침을 얻은 싯다르타는 "항상(恒常) 하는 것은 없다(無常)"에 이어,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無我)"를 설했으며, 그것은 브라만교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아트만(Atman) 영구불변설(說)을 뒤집어엎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윤회설(輪迴說)은 단지 설(說)로만 끝나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입멸(入滅)한 후, 인도의 거의 모든 불교신자는 다시 브라만교에서 개명(改名)을 한 힌두교로 개종(改宗)하였으며, 불교는 인도 밖으로 옮겨갔다. 성경(the Holy Bible), 특히 구약(舊約)을 보면, "영혼은 죽으며(에스켈 18:4)", "온유한 의인들은 천당이 아니라 ..
구원(救援)에 대한 해석은 종파별로 다르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구원은 타력(他力)에 의한 것과 자력(自力)에 의한 것 두 가지가 있다. 타력에 의한 구원은 신앙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신앙은 무조건적, 절대적이어야 한다. 우선 스스로가 죄인임을 믿어야 하며, 죄 사함을 해주신 대속주를 믿어야 한다. 조물주를 믿어야 하고, 그의 사랑과 그가 마련한 계획들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한다. 반면에 자력의 구원은 매우 간단하다. 자신의 정체성만을 확인(見性)하면 된다. 그것뿐이다. 자각(自覺)을 이루는 순간,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저절로 풀린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타력의 신앙을 통해 구원받았음을 간증한다. 그러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믿음은 대체로 삶을 긍정적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은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고, 그것은 기쁨과 감사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더욱 대단한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까지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수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믿기에 앞서 믿는 주체,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과 "믿는 자" 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에 앞서 그 둘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선결되어야 한다. 둘 중에 하나가 부실하면 나머지도 당연히 부실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믿는 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神), 도(道), 자연(自然) 등의 믿음의 대상은 자신에 대해 무지..
믿음이란 확인이 불가능한 사항에 대해 실제성을 부여하는 것(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나타나지 않은 것을 증거(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 채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스스로 선택했든, 타인에 의해 유도되었든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설명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강요이다. 그 믿음이 혼자만의 것일 경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강요되는 절대적 信仰(우러러 받드는 믿음)으로 탈바꿈 되고나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나는 믿음을 신앙으로 바꾸는 자들을 잘 이해한다. 그것이 그들의 재산과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와 眞理를 동의어로 만들고, 신앙을 종교(宗敎)라 주장하지만 결코 믿음이 진리일 수는 없으며 신앙이 종교일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 믿을 수 있지만 ..
내가 알 수 있는 단 한가지 사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과학: 공상의 친구" 여기 과학에 매료된 사람이 있다. 과학이 인류가 발달시킨 최고의 지식 및 지성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이야말로 객관적이고 증명을 바탕으로 한 청정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궁극의 수행법 혹은 진리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결론적으로 사기 혹은 거짓말의 일종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며, 성인의 가르침이라도 할지라도 현대과학의 틀 안에서 해석이 가능할 때에만 받아들인다. (본인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마 무의식적으로는 믿을 것은 과학 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신봉하고픈 과학은 결코 하느님(God)을 따라잡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