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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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바라봄

과학: 공상의 친구

thedaywemet 2017. 1. 3. 20:51
내가 알 수 있는 단 한가지 사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과학: 공상의 친구"

여기 과학에 매료된 사람이 있다. 과학이 인류가 발달시킨 최고의 지식 및 지성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이야말로 객관적이고 증명을 바탕으로 한 청정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궁극의 수행법 혹은 진리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결론적으로 사기 혹은 거짓말의 일종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며, 성인의 가르침이라도 할지라도 현대과학의 틀 안에서 해석이 가능할 때에만 받아들인다. (본인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마 무의식적으로는 믿을 것은 과학 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신봉하고픈 과학은 결코 하느님(God)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하느님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불가능하다. (여기서 언급하는 하느님은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느님과는 일치하지 않음을 밝힌다)

첫번째 이유는, 과학은 언제나 뒤따르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자연 현상 혹은 창조주의 능력이 있고 그 뒤에 그것을 해석하는 과학이 있다. 과학은 현상 자체가 아니다. 현상 그 자체라면 과학과 삼매는 동의어여야 할 것이다. 과학에서는 언제나 관찰자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 물론 현대 양자역학에서는 비로소 이 경계가 모호하다고 조심스레 제시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쪽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과학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긴다고 '해석'하는 것이며, 파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빛의 현상을 보고서는 빛이 입자이기도 할 것이라고 뒤늦게(?)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그 '해석'이란 어디까지나 해당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존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가정 안에서라면 그 현상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철저한 증명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과학이 신을 앞지를 수 없다는 것은 의학이 병을 앞지를 수 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의학이 고칠 수 없었던 병을 고치는 것처럼, 과학은 미스터리한 것을 따라가며 점차 이해의 영역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드넓은 우주를 이해하고, 미세한 분자를 이해하고, 창조주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만든다. (창조주의 영역을 모두 이해하고 나면 미지의 영역으로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

또한 과학이 발달하여 이것저것 요술같은 물건들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자연의 모방이지 새로운 창조는 아니다. 과학은 아예 없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논리와 자연 현상의 재창조로써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스마트폰이나 비행기보다도 신기한 일들은 자연에 이미 있다. 박쥐는 초음파로 앞을 보고, 철새들은 아무런 네비게이션 도움 없이 지구 자기장을 인식해 비행한다)

둘째로, 과학의 이론은 변한다. 그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한때는 빛이 파동이기만 했지만 나중엔 입자도 맞다 했다. 한때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한다. 그리고 요새는  진화가 생물종이 탄생하는 원리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심증만 있을 뿐 우연한 돌연변이에 의존하는 진화로 생물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실제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과연 세월이 지나면 과학은 진화론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궁금하다. 

진화론에 대해 좀 더 설명해보겠다. 진화론이란, 지구에 등장한 모든 생물종은 오랜시간 우연한 돌연변이가 축적되어 점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으로, 창조주의 개입 없이 생물종의 출현을 설명한다. 진화론의 정황적 근거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중 핵심은 지구에 출현한 시점이 보다 나중인 생물종일수록 유전자(DNA) 점점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은 현대 진화론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점 역시 분명히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돌연변이는 이롭다기 보단 생존에 해가 되는 경우가 통상 확률적으로 높다는 점, 설령 이롭다고 하더라도 체세포 돌연변이가 생식세포(정자와 난자) 돌연변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생식세포 돌연변이어야만 후손에게 해당 형질이 전달된다), 생존과 번식에 직접적으로 유리한 형질이 아닐 경우에는 자연선택되지 않으며, 따라서 자연선택이 되려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돌연변이를 함께 수반해야 한다는 점(즉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돌연변이가 아닐 경우 또다른 돌연변이가 함께 일어나야 한가는 것), 서로 다른 종끼리는 번식(유전자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 다세포 고등 동물로 올라갈수록 유전자 기능이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포 종류와 기관에 따라 다른 유전자들의 기능과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의 유전자가 가진 한가지 성능이 좋아졌다고 조직과 기관, 개체 수준에까지 그 장점이 드러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유전자들과의 상호 관계 사이가 어긋나게 될 확률이 높다는 점 등이 있다.

진화론에서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생물계에 진화가 일어나게끔 하는 원동력을 '오랜 지구의 역사' 그리고 '우연'에 의존한다. 하지만, 인천 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목적지 없이 운행하였을 때 어느날 뉴욕에 도착하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산 중턱에 서 있는 사람이 앞을 보지 않고 길을 걸었을 때 산 정상에 올라가 있을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태어나면 늙는 것처럼, 높은 곳에 있는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인간이 건강을 유지하는 일처럼 시간과 우연에 의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진화는 퇴보가 아닌 고등생물체로서의 진보이다. 진보는 목적 의식(motivation)과 방향성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흥미로운 점은, 힌두교의 윤회사상이 진화의 원동력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힌두이즘은 jivatman이 대자유(moksha)를 깨닫는 기쁨을 얻기 위해, 우리가 깨닫기 위해 지금의 생물종들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힌두이즘이 창조주의 개입없이 진화의 원동력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많은 이들이 윤회론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지만, 윤회가 깨달음(밝음)을 추구하는 것이 우주 삼라만상의 본성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을 알아차린 수행자들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윤회가 어떤 절대자의 환생이나 탈바꿈을 의미한다고만 받아들인다면 진부한 내세론에 불과할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과학으로 하느님을 연구할 수 있을까? 
먼 미래에 과학이 인공지능을 동원하여 모든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또 조종할 수 있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마치 영화 '트렌센던스'에서처럼 말이다. 그 때 남은 미지의 영역은 바로 '나 자신' 일 것이다. 내가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체이니 말이다. '나'라고 살아움직이는 이것은 과학처럼 현상을 뒤따라가는 해석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무엇 앞에 엎드려 절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에게는 숭배될 수 없는 차원에 있는 것이다! 그럼 내 자신이 미지의 영역=하느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것을 '참나'라고 이름붙이면 어떨까? '아트만'이라고 이름하면 어떨까?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모르는 자는 뭐라고 이름해도 모를 일이다. 또, 그 이름붙인 그것을 무엇이라 설명한들 충분할까?

어째서 과학으로는 나 자신(=미래에 남겨질 단 하나의 미스터리한 영역)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걸까? 이유는 당연하다. 현재의 과학(미래 과학은 지금의 과학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 추측해본다. 명상, 수학, 음악을 비롯해 모든 것이 통합된 학문일지도 모른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서처럼..)은 그 관찰 대상이 나 자신이 아니고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신앙으로는 왜 깨달음에 다가갈 수 없는 걸까? 역시 나 자신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고 외부의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둘은 모두 "나 자신"이라는 주제에 대해 매우 가깝지만 (과학 역시 철학에서 출발했다) 스스로를 보기 위해 아주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이것이 두 분야의 공통점이다.

과학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신앙과 반대편에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공상과는 친구지간이다. 공상이 실제 과학기술의 힘으로 현실화되는 것을 보더라도 과학과 공상은 서로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 공중에 떠서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 시공간이 휘어질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과학이 밝혀낸 것들이다. 과학은 실재와 가까울까? 아니면 공상에 더 가까울까? 과학자들은 늘 이점을 염두에 두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자, 여기 과학에 심취한 자가 있다. 아니, 과학은 심취라는 것이 불가능한 학문이다. 그렇기에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은 과학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다.

도취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도취는 대단히 유용하다. 도취는 자신감을 주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안겨주는 성공의 열쇄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탐구(정견)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도취는 에고를 만족시킬지는 몰라도, 나 자신(미지의 하느님)에 대한 탐구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아나 연기 사상 그리고 선도의 태극 음양, 상생과 같은 개념은 현대 과학과 직접 연계되어 있어 어느 정도 학문을 한 요즘 세상 사람이면 이해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내 안의 '하느님'을 단지 연기 사상과 대립되는 절대자의 개념이라고만 단정짓고 부정하기보다는, 에고와 상생(연기)하며 에고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자아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왜냐하면 결국 관심을 자아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돌려야 공부가 의미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 쓸모있는 이유는, 바로 내 자신의 편견 또한 그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신을 들여다보길 원한다면 에고가 무엇에 도취하고 의존하는지를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을 어떻게 내느냐와 해석의 문제이지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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