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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사람들은 이상도 하다. 스스로를 깨우치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의심없이 사이비 종교에 엎드리기를 좋아한다. 수행(修行)과 신앙(信仰)은 전적으로 다른 법임을 알아야 한다. 수행은 관심사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며, 신앙은 외부에 있는 알지 못할 그것이다. 사이비종교를 살펴보면, 처음엔 자기를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는 가공(假空)의 존재의 대리자라고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은근슬쩍 자기가 그것(하느님, 天尊, 上帝)이라고 주장한다. 굳이 하느님이란 존재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야기의 말미가 하느님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원님 덕에 나팔 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관심사를 외부로 돌리지 말라.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 사람이 하느님(..
배움은 말에서 시작하여 문자(文字)의 이해로 마무리된다. 문자는 사물을 이해하는 도구이며, 진리(眞理)로 통하는 창구이다. 그러므로 문자가 없는 세상은 거의 암흑이 지배할 수밖에 없다. 우선 종교(宗敎)와 신앙(信仰)에 대한 문자 공부를 해보자. 혹시 종교와 신앙은 전혀 다른 말이란 것을 알고 있는가? 무식하게도 신앙인들은 자기의 믿음을 종교라고 부른다. 깨우쳐야 한다. 종교는 꼭대기(宗) 가르침(敎)이란 말이며, 신앙은 우러러(仰) 받들어 믿는(信)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랑과 평화이며, 신앙은 분열과 전쟁의 대명사가 된다.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고요한 정상(宗)에서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지만, 신앙인들은 결코 자기와 다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목숨 바쳐 다툰다. 그들은 매우 적..
삼권분립(三權分立)이란 말이 무색합니다. 당권에 입후보한 사람들이 대통령의 눈치를 봅니다. 심지어 *핵관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인간은 원래 자유를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에도 구속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주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신앙 대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찬양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고 가르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으뜸 가르침(宗敎)이라 합니다. 단지 이익을 위한 행위(信仰)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세상엔 그런 것이 넘치도록 많은데 그것 때문에 착취 폭력이 생기고 살인이 일어납니다. 자기가 만든 것에 자기가 복종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깨달음이란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양심(良心)의 범위는 당사자 의식(意識)의 넓이만큼이다. 실수로 개미 한 마리를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이 있고, 타인의 불행을 보면 돕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떼로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가책이 없이 양양한 사람이 있고 남이야 어찌 살던 자기 이익에만 급급하면서 자기처럼 양심적인 사람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거주하고 있는 나라의 관습이나 법에 어긋나지 않거나 신앙하는 종교의 계율을 잘 따르기만 하면 일단은 양심적인가? 역사 이래,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良心을 덧씌워 대중을 사지(死地)로 몰고 갔던 비양심적인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양심이란 말로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범위를 가늠키 어려울 만큼의 양심이 자리 잡고 있다. 선지식(善知識)의..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당신은 무엇이라도 믿을 수 있으며,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종교(宗敎)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신앙(信仰)일 뿐, 宗敎가 될 수는 없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의 마음에 드는 것, 당신에게 유리한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宗敎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眞理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宗敎와 信仰을 혼용해 쓴다고 해서 당신도 그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의 인격과 관계가 있다. 종교는 믿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최고(宗)의 가르침(敎)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信仰은 다르다. 그것이 무엇이든(나무, 돌, 짐승 같은 사이비) 단지 믿어(信) 우러르기(仰)만 하면 성립되니 말이다. 宗敎는 분열될 수 없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생각처럼 허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도록 구조된 생명체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마음 안에 구체화하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된 후 일어날 일들을 미리 구상하십시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모두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당신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요령은 그것뿐입니다. 그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일들을 모두 이루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혹시 믿음이 부족하면 글로 정리해 보십시오. 공표하면 더욱 힘이 생깁니다. 자기를 믿으세요.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자기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말이나 정책에 있지 않다. 자기를 믿어야 자유롭게 된다. 헛된 믿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유를 말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믿음은 괴로움(苦)의 원인이다. 그것은 폭력으로 변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과 자비라 할지라도 그것이 강요되는 것이라면 쓰레기와 다를 바 없다. 세상에 믿음처럼 악취를 풍기는 것도 없다. 그것은 자유의 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믿음을 저울에 올릴 수 없다면, 그것이 이미 고정화되었다면, 당신은 깨달을 수 없다. 주시(注視)하라.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과거 우리 학생들의 목표는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변화가 오고 있다. 아마도 그것만이 잘사는 길은 아니라라고 판단되기 때문일 것이다. 십여 년을 고생 고생해 들어간 대학을 자퇴(自退)하는 학생 수도 늘어간다고 한다. 서초동에 가면 발에 치이는 것이 변호사이고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 의원도 부지기수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너무 건너 뛰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왕위를 버리고 걸인(比丘)을 택한 된시타르타는 “나는 고(苦)와 그것을 없애는 법(滅)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는 쌩뚱맞은 소리를 했다. 그가 과연 행복했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요즘은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숫자도 현저히 줄어 들고 팔겠다는 절이나 교회도 늘..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일러라, 일러라.” 공부처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겁니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수행이 무르익어 터질 때가 다된 사람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에겐 너무 버거운 말이다.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자. 상대의 눈 높이에 맞춰 말해야 한다. 수행 길에 나선 많은 사람들이 헤매는 이유는 알아듣기 어려운 추상적인 말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라. 진리(眞理)는 어렵지 않고, 추상적이지도 않다. 깨달음을 위해 신앙에 귀의하거나, 굳이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 산으로 갈 필요는 없다. 그것이 우리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가치가 없다. 수행자라 할지라도 역시 생활인일 수밖에 없다.
https://youtu.be/116E3Cfg_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