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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깨달음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사고력은 필요하다.책을 보거나 깨달음 강의를 들을 때 우선적으로 사고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사고 작용을 버려야 한다는 것 역시 사고 작용이다.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잠시 사고를 미루어야 한다. 생각이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이다.사고는 흔들리는 습성이 있다.그것이 깨달음을 의심하게 한다."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지금 당신이 어떤 수행을 하고 있다면, 여기저기 기웃대지 말고 그것으로 밀고 가 끝장을 보도록 하라.사실상 누구나 이미 깨달아 있으니 말이다.당신은 늘 당신의 깨달음을 의심하고 있다.그것이 당신이 깨닫지 못하는 큰 이유다.확신은 단번에 오지 않는다.처음 얼마 동안은 살이 떨릴 정도로 마음이 내려놓아질..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으뜸이다"라고 예수는 말했다.맞는 말이다.사랑만 있으면, 소망도, 믿음도 생겨난다.어렵게 인류애니.. 홍익인간이니.. 하는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누군가(무엇인가)를 진정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진정 사랑에 빠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모든 것은 사랑 속에 녹아들고 만다.하지만 사랑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오랜 시간과 몸과 마음의 수련이 필요하다.정성을 많이 쏟아야 한다.사랑은 기운(氣運)을 부른다.에너지(氣)를 모르면, 그것은 부족한 사랑이다. 그것은 집착일 뿐이다.
구원이란 고통과 죄악으로부터 건져지는 것, 그것의 결과로 영생을 얻는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도 없지만, 그렇다고 "믿습니다" 라는 말을 반복한다고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행위가 따라야 한다. 성경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26)'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기를 알아야 진정한 구원이 있다. 구원받을 대상자가 바로 '자기'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구란 걸 알려면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에게 배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얻어 들은 자기는 자기가 아니니 말이다. 자기를 알려면 깨달아야 한다. 깨달아야만이 제대로된 자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를 이해하게 된 것을 깨달음이라 하는 교파가 있지만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믿는다. 깨달음은 지식에서 얻는 것이 ..
세상이 나를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알아보며 살면 된다. 스스로 밀려왔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썰물처럼 밀려 나가는 것이 세상이다. 일이 실패되었다고 낙담하지 말라. 변수는 언제나 작용하니 말이다. 늘 깨어 있으라 바늘구멍 하나에 산 같은 제방도 무너지는 법이다.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그것을 성공시키는 나의 힘은 고작 50% 미만이다. 사람을 믿지 말라. 기대가 어긋나면 사랑도 떠난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누구도 믿지 말고, 오직 나를 갈고 닦아 나의 이용 가치를 높여라. 자기에게 유용하면 쓰고,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내던져지는 것이 세상이다. 끝까지 남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라. 그것이 내가 세상에서 알아채야 할 모두다.
살다 보면 깊은 절망감에 빠질 수 있다. 그때는 돈을 잃었을 때도 아니고, 시험에 떨어졌을 때도 아니다. 오직 믿고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때이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결코 실의에 빠져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하늘이 주는 큰 선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함께 지혜를 논할 수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다. 혼자 왔다 혼자 가는게 인생이다.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이다.
믿음은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동일한 것에 대하여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생각은 다르므로 믿음도 다르다. 이 사람에게 성스러운 것이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단지 생각이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대단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머리 속에 자리잡힌 생각 때문에 너무 쉽게 목숨을 내놓고 그 믿음을 주장하기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신앙을 이유로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살상이 자행되었는가? 믿음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다. 단지 축적된 지식과 정보, 즉 생각들이 엉켜서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이고 들릴 뿐이다. 선지식(善知識)의 말을 들어보자. "타인이 믿는다고...오래 믿어 왔다고...믿을 만한 사람이..
당신의 주인(主人)은 누구인가? 주인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에 따라 자기 인생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이란 것이 있다. 미신(迷信)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체(主體)가 되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라는 바람직한 사상체계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폐단이 난무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상 주체사상처럼 좋은 건 없다. 그것은 곧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깨닫기 어려운 이유는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우리 안의 속성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가 무언지를 알려 하지 않게 만든다. 그것이 왕왕 믿음의 대상을 주체로 치켜올리는데, 그 대상은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단군이 되고 사회주의, 자본주의도 되고 김일성, 윤석열도 된다. 주체가 그런 것들을 주체로 치환(置換)시켜 버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
밭에 고추 모종을 심으면 고추가 열리고, 토마토를 심으면 도마토를 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 밭에 건강을 심으면 건강해지고, 돈을 심으면 돈이 생긴다. 문제는 의심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당연하다. 일어날 일이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라. 마음의 밭을 가꾸고, 거기에 바라는 바를 심어라. 그리고 당연하다 생각해라. 당연히 원하는 결실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정신력을 사용해 원하는 것들을 끌어올 수 있다. 믿음, 열망, 기대, 그리고 기다림만 준비되었다면 말이다.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한한 존재라는 데 무지하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 등,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마음은 충족되지 않는다. 진정한 만족은 자기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지금 없는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 몸을 고르고(調身), 호흡을 가다듬으며(調息), 마음을 알아차리기(調心)만 하면 된다.
여기 빚을 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헤어나기 위해 소비를 최소화하고, 10년 동안 고생고생해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 깔고 오래 버티면 빚을 안 갚고도 해결하는 길이 있습니다. 얌체 같은 짓이지만 말입니다. 그것 역시 10년이면 얼추 해결됩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Bible(에페소서 2:8,9)에 있습니다. 그 말은 십계명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아멘, 믿습니다"만 반복하면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도들이 목사 설교 중에 그 소리를 크게 지르나 봅니다. 우리의 생각, 말, 행위 모두가 업(業)이 되어 다시 태어나서라도 기필코 갚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 그것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