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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여기 빚을 진 사람이 있습니다.그는 헤어나기 위해 소비를 최소화하고, 10년 동안 고생 고생해서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하지만 얼굴에 철판 깔고 오래 버티면 빚을 안 갚고도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얌체 같은 짓이지만 말입니다.그것 역시 10년이면 얼추 해결됩니다.Bible(에페소서 2:8,9)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그 말은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아멘, 믿습니다"만 반복하면 구원받는다 합니다.그래서 신도들이 목사 설교 중에 그 소리를 크게 지르나 봅니다.우리의 생각, 말, 행위 모두는 업(業)이 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서라도 기필코 갚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 그것 때문이라..
우리의 믿음은 왜곡되어 있다. 그것이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이유다. 우리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것만 말하라. 깨달음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그 자리에 있다. 허심(虛心)만이 깨달음의 왕도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믿음은 우리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은 삶의 목적을 알게 하고, 그것은 기쁨과 감사로 이어지고, 더욱 대단한 일은 사후에 대한 불안까지도 해소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수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믿기에 앞서, 믿는 주체(主體),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과 "믿는 자" 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에 앞서 그 둘에 대해 면밀한 관찰이 선결되어야 한다. 둘 중의 하나가 부실하면, 나머지도 당연히 부실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믿는 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神, 道, 自然 등 믿음의 대상은 자신에 대해 무지(無知)하고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예수가 제자들에게 널리 전하라고 한 Good news(福音)는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고(요한 11:25), 혹 죽는다면 천국에 살 것이다"였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자기(眞我)가 누군지를 깨우치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밝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얻으면 스스로 자기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는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확인하라고만 합니다. 물론 확인하고 안 하고는 당신의 자유이지만 말입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납니다. 생각이 말을 만들고, 행동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행동에 따라 결과가 나옵니다. 늘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시(注視)하십시오.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만사(萬事)를 일으키고, 꺼지게 하는 자리입니다.
석가모니가 집을 나선 이유는 고(suffering)의 해결이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표 역시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集)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소유이다. 선불교(禪佛敎)는 苦를 건너뛰어 자성(自性)을 알아채는 데 정성을 쏟는다. 자성을 깨우치는 순간, 苦는 붙을 여지가 없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석가와 맥(脈)을 같이 한다. 예수에 고착함으로 苦를 해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너스로 사후 천국까지 소망해 볼 수 있다. 불교가 나머지 모든 신앙들과 다른 것은 "나라는 것은 없다(無我)"이다. 그것으로 모든 고통이 무효가 되지만, 즐거움을 누릴 당체(當體) 역시 사라지고 만다. 선도의 특이한 점은 숭배의 대상(하느님, 부처)이 없다는 것이다. 몸(精), 에너지(氣), 그리고 의식(神)..
당신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 있는가? 국어사전에서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하고 있다. 1.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2. 대상(종교)에 대한 신자로서의 태도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는 마음 사실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이므로, 믿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믿음이란 첫째로는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사람 사는 데 필요한 일이며, 두 번째는 신앙조직에서 상정한 절대자를 대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신앙단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으로, 믿음이 없으면 조직은 무너진다. 보통 신앙과 종교를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식의 소치이거나 자기 신앙에 대한 과포장이다. 믿음처럼 모호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것은 없다. 그것을 위해 목숨도 바치지만, 그것처럼 배신이 흔한 것도..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었는가?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는가?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는가? 혹시 그런 것들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산타할아버지가 굴뚝으로 들어오신다고 알고 있는 세 살배기 아이와 같다. 믿음이란 단지 선택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믿기로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다. 세상에 믿을 것은 거의 없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늘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관심 가질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당신 자신, 즉 믿기로 하는 그 마음(안 믿기로 하기도 하지만...)뿐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한다면, 생각들이 모두 제거된 오락가락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本來面目), 그것은 변하지 않으며, 세상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것으로부터 세상은 일어나고 꺼진다. 그것이..
믿는 만큼 이루어진다. 그것은 부모 자식 간, 친구 간이나 스승 제자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의심은 의심스런 일의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의심의 에너지는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가장 먼저 자기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그것에 따라 주변의 에너지가 변하기 때문이다. 늘 자기 관조(觀照)를 늦춰서는 안 된다. 믿음을 주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한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꼭 그릇 크기만큼만 받는다. 그것은 우주의 이치다.
우리에겐 형체는 분명치 않아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음이라 하며,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바로 그놈입니다. 그놈 속에는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서, 비우면 비울수록 그것의 기능이 형상됩니다. 비울 것은 생각들과 그것이 굳어진 믿음이란 놈입니다. 그것들이 쓸어내지면, 그 자리엔 자성(自性)만 남습니다. 그 쓰레기들(생각들과 믿음)은 분명 일시적으로는 유용했었지만, 그것들은 마치 점령군과 같습니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음 비우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두들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검사(檢事)의 범법을 한통속의 檢事들로 밝히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