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7. 구원: 자력-타력, 종교-신앙 (Salvation) (37)
谷神不死
믿음은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동일한 것에 대하여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생각은 다르므로 믿음도 다르다. 이 사람에게 성스러운 것이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단지 생각이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대단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머리 속에 자리잡힌 생각 때문에 너무 쉽게 목숨을 내놓고 그 믿음을 주장하기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신앙을 이유로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살상이 자행되었는가? 믿음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다. 단지 축적된 지식과 정보, 즉 생각들이 엉켜서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이고 들릴 뿐이다. 선지식(善知識)의 말을 들어보자. "타인이 믿는다고...오래 믿어 왔다고...믿을 만한 사람이..
회원 한 사람이 자신의 박사학위 취득을 알리려고 내 거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고급 은행원이며 MBA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가톨릭을 신앙(信仰)하고 있었는데, 대화가 자연스럽게 신앙으로 옮겨갔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가톨릭이 창시되는 시점, 예수교를 국교로 정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에 그들(로마인)이 이미 믿고 있었던 태양신 숭배를 삽입시켰으며, 그 후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사랑)에 위배되는 잔인한 일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자행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대 같은 인텔리가 비합리를 가득 담은 그런 신앙단체에 소속될 수 있는가?” 그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답했다. “앞으로 그런 것에 대해선 재론치 마세요. 그것은 나의 신앙이고, 신앙은 자유입니다.” 신앙(信仰)이란 “믿어서 우러..
밝아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퇴색(退色)의 길을 가고는 있으나, 아직도 한국의 기독교는 세(勢)를 과시하고 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란 말로 전도를 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지 못하자, 요즘은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조금 수준이 있는 전도 용어가 생겨났단다. 물론 지금 살기도 바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지만 말이다. 청파동의 유명한 K 목사는 "너희는 이미 부처다”라는 부처의 멘트와 비슷하게, "우리는 모두 이미 구원받았다"면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무슨 구원이요?"라고 되물으라는 조언을 주고 있다. 구원이란 두 가지 의미로 집약할 수가 있는데, 첫째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이고, 둘째는 (기독교적 의미로)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
사람들은 신앙(信仰)과 종교(宗敎)를 구별하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고 말해야 옳다. 신앙과 종교는 혼용되어서도 안 된다. 신앙인들은 자기의 믿음을 '종교'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초로(初老)의 할머니가 새색시가 되고 싶어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편을 '신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신랑(新郞)'이란, 갓 결혼하였거나 결혼하는 남자, 혹은 신혼 초의 남편을 이르는 말이란 것은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종교(宗敎)'는 '꼭대기(宗) 가르침(敎)'이란 말이며, '신앙(信仰)'은 '우러러(仰) 받들어 믿는(信)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지만, 신앙은 100년 전과 지금의 신앙이 다르다.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 미주(美州), 시베리아, 남미, 아프리카의 신앙이 각..
세상엔 수많은 신앙인이 있고, 극소수의 수행자가 있다. 신앙(信仰)은 "믿어 우러르는 것(worship)"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는 따로 수행(修行)이 필요하지 않다. 신앙인은 신앙의 대상에 전적으로 귀의(歸依)했으므로 그의 가르침이라면 무엇이든 믿어야 하고, 무엇이든 그 대상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 돈을 내라 하면 내야하고, 심지어 살인을 명령해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보상으로 천국이 보장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앙의 대상이 직접 험한 일을 시키는 법은 없다. 항상 인간 대리자에 의해 지시된다. 그런 점이 수행과는 아주 다르다. 수행자는 교파(敎派)에 소속되기 어렵다. 더러 소속되는 경우가 있어도 곧 이단(異端) 대접을 받게 되는데, 이치(理致)에 어긋나는 요구에는 의문을 품기 때문이..
예수를 비롯하여 성인(聖人)들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믿느냐?"며 늘 그들의 믿음을 확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자유를 얻은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들의 믿음을 요구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자비심입니다. 그에겐 타인의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그를 믿든 믿지 않든,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 중에 몇 명이 믿는다고 그가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믿음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그들에겐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외 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치를 열심히 가르쳤는데 이해가 늦는 아이에게 나는 "외워라. 그렇게라도 해야 낙제는 면할 거야. 혹시 10등 안에 들지도 모르지."라고 말..
죽으면 에너지가 흩어지고 맙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에너지가 없습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만 남길 뿐입니다. 죽은 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죽어 없으니 이해 못 하는 내 머리가 문제라며 끙끙대겠지요. 죽은 스승은 에너지를 가져올 수도, 심어줄 수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스승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 이야기는 허공에 메아리쳐봐야 거기서 거기입니다. 살아있는 스승이라야 만져볼 수도, 따져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밝음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구해야지요. 떠난 사람, 죽은 스승에 대한 미련은 인제 그만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람직한 믿음과 사이비 믿음 등 수많은 믿음이 있지만, 믿음이란 단지 생각 덩어리일 뿐이다. 믿음은 이야기할만한 것이 못된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기꾼이나 사이비교주 뿐이다.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는 합리(合理)를 강조하며, "깨어있으라!", "자기 안의 불을 켜라(自燈明)"고 늘 말한다. 고정된 생각이 모이고, 시간이 흐르면, 거기서 믿음이란 괴물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事實: fact)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이며, 평생을 닦고도 그 간단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이다. 수행은 내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무엇을 반대하는가를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믿음이란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하나로 충분하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변질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알아채지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기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알아챈 그것을 깨달음이라 하여서는 안 됩니다. 누가 보고, 듣고, 알아채는가? 그것에 대해 깨어있는 것,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무엇인가 본 것이 있다거나, 신기한 무엇을 듣고 놀라운 느낌들이 생긴 것을 깨달음이라고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것입니다. 보는 놈, 듣는 놈, 알아채는 놈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이 아니라 직접 보는 것을 가리켜 '각성(覺醒)'이라 하며,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오직 깨달음만이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가 천국(天國)이며, 극락(極樂)이며, 지복(至福)입니다.
자기 깨달음은 없이, 죽은 사람 이야기를 중심으로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붓다는 분명히 경전(經典)이라 할지라도 믿지 말라 했는데 말입니다. 경전은 그들이 죽은 후 남긴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대개 죽은 이의 이야기는 각색이 됩니다. 마치 자기가 쓰는 자서전처럼 말입니다. 죽은 이의 이야기는 대개 그의 추종자였던 사람이 만들어냅니다. 가급적 그의 취약한 모습은 축소되고, 그의 위대성이 강조되며 전래하는 훌륭한 이야기들을 끌어옵니다. 죽은 사람 이야기는 뻥튀기가 많습니다. 아무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에는 저속한 차력사나 마술사, 잔재주꾼이 대도인(大道人)으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기한이 지나버린 수표는 버리세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문제를 상담하세요. 그가 비록 영화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