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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그것을 "인식(認識)의 주체(主體)"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알아차림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라.그것이 인식의 주체이다. 알아차림 속에 인식의 주체도 함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에너지 속에서 삽니다. 에너지는 생긴 적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지만, 모든 일을 합니다. 그것은 빛을 주고, 열(熱)을 주고,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사랑도 안 되고, 심지어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지만, 모든 작용의 주체(主體)가 되고 깨달음으로도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그것이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를 우리말로 '기(氣)'라고 합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믿음은 우리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은 삶의 목적을 알게 하고, 그것은 기쁨과 감사로 이어지고, 더욱 대단한 일은 사후에 대한 불안까지도 해소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수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믿기에 앞서, 믿는 주체(主體),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과 "믿는 자" 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에 앞서 그 둘에 대해 면밀한 관찰이 선결되어야 한다. 둘 중의 하나가 부실하면, 나머지도 당연히 부실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믿는 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神, 道, 自然 등 믿음의 대상은 자신에 대해 무지(無知)하고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는 것이 진정 없다면(無我), 무엇이 윤회(輪廻)하는가? 이것에 똑 떨어지는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시원한 답은 나오지 못했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윤회에 대해서 재론치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하다. 석가모니 재세 시, 윤회는 민중의 상식이었다. 윤회는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의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무아(無我)와 윤회는 모순이다. 알쏭달쏭하게 설명 할 수밖에 없다. 윤회 신봉자들, 그들의 변을 한번 들어보자. * * * * *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연기(緣起)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연이면서 동시에 필연이다. 존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사라진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윤회(輪廻)를 ..
마음의 바닥을 보지 못하면, 부귀영화도 한낱 꿈에 불과하다. 마음이 주인인 듯싶어도, 마음은 주체(自性)가 없이 인연 따라 흐르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모두라고 하지만, 그것이 꿈이고,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그것을 깨우쳤다 해도, 깨우친 자리에 대한 확연한 파악이 없어서는 갈증이 멎지 않는다. 그 깨우친 자리가 무엇의 도움을 얻어 꿈과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지에 무관심하다면, 평생을 닦아도 애물단지 하나 금고에 모셔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긴 생각(長考) 끝에 헛수(緩着) 둔다는 말처럼, 가장 간단한 것을 놓치고 있다. 이기(理氣)는 일원(一元)이란 말을 헛되이 듣지 말라! 세상에 에너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던가? 주위에 머물며 자기 존..
있음이 있지 않으면 없음이 있을 수 없다. 없음이 없이 있음이 있을 수 없듯이 ... 있음은 그저 여여(如如)하건만, 생각 좀 한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없음' 편에 선다. 그들이 주장하는 없음의 논리는,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매 이것도 있듯,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결국 그들 주장의 끝은 내(主體)가 없다는 것(無我)인데, 그렇다면 여기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름 붙이길, '공(空)'이라 하든, '허(虛)'라 하든, 여기 '이놈'이 없으면, 있음도 없음(無我)의 주장 자체도 없을텐데... 자가당착(自家撞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