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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겠습니다. 그것이 큰 파급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2500년 전 시타르타의 "무아(無我)"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매우 시끄럽습니다. 그의 "연기(緣起)"라는 존재관(存在觀)에서 비롯하여 본래면목(本來面目)도 사실은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는 논리(論理)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들리면, 일단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무아(無我)는 유아(唯我), 즉 진아(眞我)의 반증이 아닐까요? 죄 있다고 결론을 먼저 내리고 추궁하다 보면, 결국은 무죄(無罪)도 유죄(有罪)가 되고 마는 것이 세상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가설은 가설일 뿐입니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데카르트의 가설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있게 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가설(假說)에 기초하여 인간들은 각기 자기 입맛에 맞는 神들을 조작(造作)하고 그것들을 우러르며 믿는다(信仰). 심지어 불교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를 주장한 시타르타마저도 신격화(神格化)하여 그의 상(像)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고 있다. 생각이 없다면 과연 나는 없을까? 미미하고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생각이 없다는 것,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챈 '그놈'은 끝까지 남지 않던가? 그것을 알아챘다면 당신은 문 하나를 통과한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것이 진정 없다면(無我), 무엇이 윤회(輪廻)하는가? 이것에 똑 떨어지는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시원한 답은 나오지 못했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윤회에 대해서 재론치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하다. 석가모니 재세 시, 윤회는 민중의 상식이었다. 윤회는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의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무아(無我)와 윤회는 모순이다. 알쏭달쏭하게 설명 할 수밖에 없다. 윤회 신봉자들, 그들의 변을 한번 들어보자. * * * * *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연기(緣起)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연이면서 동시에 필연이다. 존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사라진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윤회(輪廻)를 ..
무엇으로 당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하길,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존재의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몸이 당신인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이 당신인가? 저 산이, 저 시냇물 소리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당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러면... 생각(마음)이 '나'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잠을 자는 이유는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단 몇 분 깜박 잠을 잔 것 같은데 온몸의 피로가 풀리고 정신이 맑아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너지의 효율화 때문입니다. 아무리 잠을 많이 잤어도 잠자는 내내 이것저것 별 소용이 없는 잡생각들이 끊기지 않았다면 에너지를 낭비했을 뿐 잠을 자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땐 잠에 집착 말고 간단한 외단공(外丹功)과 단전(丹田) 주시를 배워 보세요. 잠보다 더 깊은 에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집중이 잘되지 않는 것은 에너지 충전이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그럴 땐 만사를 제치고 에너지 보충을 해줘야 합니다. 이 세상은 에너지 덩어리이며, 존재 역시 에너지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또한 “나는 생각하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별로 유명치 않은 말이 있다. 깨달음 자는 생각 없이 존재한다. 당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당신의 바람이 돈과 권력이라면, 그것을 위해 나머지 것들은 내려놓으라.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지나간 추억이라면, 새 삶을 짜라. 버스가 떠나면 다음 버스가 오는 법. 지나가 버린 것은 전조(前兆)에 불과하다. 지금 당신에겐 더 큰 것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존재(存在)의 확인이요, 그것과 함께 하는 멈추지 않는 생명력(生命力)이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음과 함께 말이다. 선도(仙道)와의 인연 역시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 속맛을 보고 보내라. 그처럼 달콤한 것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재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 사람의 캐릭터는 재물이다. 어떤 이는 권력으로 존재한다. 그 사람에게는 휴머니즘이 없다. 오직 과시하는 권력뿐이다. 어떤 이는 학식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어떤 이는 예술성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어떤 이는 존재 없음(?)으로 존재를 나타내려 한다. 어쨌든 사람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산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어떤 이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으로, 어떤 이는 포악하고 까다로운 성격으로... 어떤 이는 남을 놀라게 하고,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주고, 그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중 특이한 경우는 내가 이렇게 희생하고 산다고, 타인에게 부담을 주는 것으로 ..
노자는 진화론과 창조론 대신 '도(道)'를 이야기 했다. 물론 '도'는 생명체의 탄생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어쨌든, 노자의 입장이 하나의 이론으로 설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응용을 불러온다는 것이고, 이것은 이익창출과 직결되므로 인간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꽤나 흥분되는 것은, 머지 않아 모든 발달된 학문은 '미스터리를 설명해 주지 않는 노자의 불친절한 이론'이 옳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밖에는 없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현대의 학문은 응용의 방향으로는 무한 발산하지만, 그 근본 원리를 알아내는 쪽으로는 오직 수렴할 뿐, 그 원리 자체에는 도달할 방도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 수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서로 양립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