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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1991년, 감신대 변선환 학장은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며,'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 이유로 학장은 물론 목사직에서도 면직됐다. 그의 제자인 이현주 목사는, "그가 '기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고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그런 일은 기독교뿐만이 이니라, 의외로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특히 불교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불교에 대해 언급하면 심히 불쾌해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다름없이 배타적(공격적)인 사람이 적지 않다. 칼라마경에 나오는 부처의 가르침을 같이 읽어보자.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沙門) · 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은 설명하고 드러나..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은 어디까지나 생로병사의 해결이었다.그는 오랜 고행 끝에 그 실마리를 풀었는데, 그것은 무아(無我)였고, 열반(涅槃), 즉 적멸(寂滅)이었다.그것으로 그는 부처의 위에 오를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그것을 중생(衆生)에게 밝히는 것을 꺼렸는데, 그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고 반길 중생은 없다는 것이었고, 부득이 꿩 대신 닭 격인 고(苦)의 해결책, 즉 사성제와 팔정도를 내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으며, 궁극적인 깨우침과도 거리가 멀었다.해결해야 할 것은 苦의 당체인 자아에 대한 깨우침이었으며, 결국 그는 원인무효를 시키는 방편, 즉 無我를 주장함으로써 일단 문제를 봉합했다.그라나 그것이 신박한 해결책이긴 했지만, 너무 비관적인 풀이라서 대중의 문제해결책으론 많이 부족..
불교와 인연이 있는 사람,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부정한다. '자아(自我)'를 죽여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비판(批判) 없이 그것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다. 나는 자기를 '없다'고 하고 부정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석가의 삼법인(三法印) 중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리(敎理)에 근거한다. 과연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는 연기(緣起)하는 것이 맞고, 다분히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론상(理論上)으로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에고(자아)'를 죽여야 하고, 무아(無我) 교리를 따라,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무념무상(無常)을 체험..
깨달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법(法)을 전하려면 견문(見聞)이 넓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서양 사람 말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구석방에 쭈그려 않은 고집탱이 할배가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는 불교신자입니다. 불교 이외의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과학이나 에너지 같은 건 몰라도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도 말합니다. 그냥 바탕자리 본래면목만 깨우쳐 몇십 년 지키고 있으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주장합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그런 주장조차 할 수 없을텐데 말입니다. 깨달음이 단지 시작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나 봅니다. 깨달음도 버려야 하는 이치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대강백(大講伯)이요, 만공(滿空), 혜월(..
석가모니가 집을 나선 이유는 고(suffering)의 해결이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표 역시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集)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소유이다. 선불교(禪佛敎)는 苦를 건너뛰어 자성(自性)을 알아채는 데 정성을 쏟는다. 자성을 깨우치는 순간, 苦는 붙을 여지가 없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석가와 맥(脈)을 같이 한다. 예수에 고착함으로 苦를 해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너스로 사후 천국까지 소망해 볼 수 있다. 불교가 나머지 모든 신앙들과 다른 것은 "나라는 것은 없다(無我)"이다. 그것으로 모든 고통이 무효가 되지만, 즐거움을 누릴 당체(當體) 역시 사라지고 만다. 선도의 특이한 점은 숭배의 대상(하느님, 부처)이 없다는 것이다. 몸(精), 에너지(氣), 그리고 의식(神)..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에게 왜 불교를 신앙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부처님이 현세의 고통과 사후의 문제를 해결해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선도(仙道)를 하는 사람에게 왜 선도를 닦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신선(神仙)이 되려고 한다고 했다. 무엇을 신선이라 하느냐 물으니 '자유인'이라 했다 佛道와 仙道는 말만 다를 뿐,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불합종(仙佛合宗)이란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인선(人仙)은 현세를 걸림없이 사는 사람이요, 지선(地仙)은 生死를 해결한 신선이요, 천선은 무여해탈(無餘解脫)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도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본다. 몸을 닦으면서 마음을 닦는다. 물론 에너지(氣) 공부를 중심으로 하지만 말이다. 선도는 점법(漸法)이고, 단계적으로..
BC 1300년경부터 인도는 침입자 아리안(Aryan)이 만든 브라만교(Brahmanism)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브라만교는 "베다(Veda)"를 기초로 하여 사제(司祭)인 브라만이 주도로 신분(Caste)제도를 도입하여 국민을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으로 차등했다. 강령은 첫째, 베다는 神의 계시이므로 의심하지 말 것, 둘째, 제사를 통해 재앙을 쫓고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셋째, 브라만은 존귀하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소 주술적 신앙이었다. BC 4~5세기경 시타르타가 출현하여 Atman 없음과 고통의 소멸을 주장하며 신(神)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했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여 신분 차이를 배격하여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른바 불교(佛敎)다. 시타르타..
기독교에서 가장 받기 어려운 질문은, "하느님은 누가 창조했는가?"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이므로, '스스로 있는 분'이라고 하지만, 궁색하기 그지없는 답입니다. 조물주를 주장하는 한, 당연히 그를 만든 자도 있겠지요. '금강경'에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공표합니다. 그만이 가진 신통(神通)이 따로 있으며, 어떤 아라한보다 수승(殊勝)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점은 기독교의 주장과 불교는 거의 흡사합니다. 하나같이 신앙은 모순으로 버무린 비빔밥입니다. 교조(敎祖)는 어떠한 법(法)도 초월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모두를 하나로 아우른다.그러므로, 기독(基督)만이 진리라는 말이 독선(獨善)이듯이,불교(佛敎)만이 진리라는 말도 옳지 않다.이(理)와 기(氣)는 하나다(理氣一元).그러므로, 理를 깨우쳤으면 氣 역시 갈고 닦아야 한다.이것이 있으면 필히 저것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이것뿐"이라는 관념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한 과목만 잘해서는 시험에 통과할 수 없다.견성(見性)을 했다면 氣를 알아야 하고,소주천(小周天)을 이루었다면 본성(本性)을 깨우쳐야 비로소 완성이다.더 이상 찾을 것이 없어야 한다.더 이상 기웃거림이 사라져야 한다. 하나가 된 자는 부족함이 없으며, 남의 동네에 가서 자기의 깨달음을 말할 필요 역시 없다.그런 사람을 무사인(無事人)이라 부른다.
우리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기독(基督)의 가르침은 그것을 원죄(原罪)라 하고, 불교(佛敎) 역시 그것 (分別心)에서 벗어남(涅槃)이 최상이라 생각하지만 역시 바로 지금도 나누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 2:17) 佛道와 仙道는 하나다. 佛者는 공(空)을 이야기하고, 仙人은 허(虛)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같은 것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의 중심 가르침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생각한다. 그 두 마디 역시 둘이 아니다. '선불합종(仙佛合宗)'이란 말이 있다. 불과 선이 같은 가르침이란 뜻이다. 언뜻 생각에 불자는 색즉시공을 말하고, 선인은 공즉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