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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와 요가

[선도] 중도(中道)

알아챔 2019. 11. 20. 08:00


‘치우치지 아니하는 도리’를 중도(中道)라 한다고 하여, 우유부단한 것을 중도라 하여서는 안 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길’이라 하여, 중립(中立)을 중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주자(朱子)는 '중용(中庸)'을 설명하기를, ‘중’이란 기울어지거나 의지하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며, ‘용’은 평상(平常)함을 뜻하니 본분을 지켜 괴이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선도(仙道)의 입장은 다릅니다. 선도에서는 세상 모두를 치우침이 없이 모두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을 중도라 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가리지 않고 비춰내는 거울이 가장 중도스럽다고 합니다. 거울은 큰 것, 작은 것, 깨끗한 것, 더러운 것, 비싼 것, 싼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느 것이나 차별 없이 성의껏 비춰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많은 것, 적은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거친 것과 부드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다르고 서로가 서로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 모두는 그 상대가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있음과 없음이나 밝고 어두움, 그리고 정의와 불의는 반대 개념을 밑바탕에 두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선도는 양편을 같이 봅니다. 양편을 같이 보면 양편의 구별이 없어지고, 양편이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바로 선도가 이야기하는 허(虛)입니다. 그러므로 선도의 눈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도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인의예지신 역시 허깨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인(仁)이며, 무엇이 의(義)입니까? 사람에 따라 때와 장소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것이 인의(仁義)가 아니던가요?

 

선도에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 없으며, 계율(戒律) 역시 없습니다. 계율은 지켜지지 않아서 계율이란 말이 있습니다. 굳이 그런 계율이라면 장식품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도는 실용(實用)을 중시하며 실존(實存)만을 최우선으로 둡니다. 그래서 더욱 중도를 강조합니다. 궁극적인 자리(還至本處), 허(虛)에 이르기 위해선 중도를 깨우쳐야 합니다. 중도가 바로 허(虛)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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