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우선 순위가 바뀌었다 본문
'10년 공부'라는 말이 있다. 어떤 분야이든지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0년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도 있다. 10년을 애써 공부한 것이 수포가 되었다는 말이다.
'10년 공부'란 말은 이해가 된다. 천재가 아닌 담에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지 않으면 문제에 부딪힐 때 해결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문제다.
순서가 문제다.
학교에 가면 정해놓은 공부의 순서가 있다. 우선 글 읽기로 시작하여 글의 의미 깨우치기, 이어서 셈법, 사회 이해하기, 바른 사회생활 주입, 자연현상 이해하기, 그리고는 체육과 예능, 기술의 순서이다. 물론 서양은 놀이와 체육,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사회생활의 순서이지만...
그러나 그 순서를 당사자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생각이 없이 편리한 대로 정한 것 같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청소의 순서를 생각해 보았다. 청소는 위에서부터 시작해 바닥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번 손을 안 대고 청소를 마무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인생 공부의 순서는 어떻게 정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기독교는 첫째가 ‘사랑’이라 가르치고, 불교는 보시(布施)를 우선하며, 유도(儒道)는 사단(四端)을 가르치며, 선도(仙道)는 의수단전(意守丹田)을 우선으로 둔다.
그런데... 그들 모두의 공부에 주체(主體)인 ‘나’가 빠져있다. ‘자기(自己)’가 없이 ‘사랑’, ‘보시’, ‘사단‘, ’연정화기‘ 중 하나인들 가능한가? 주체가 없이는 그런 공부들을 할 수도, 실천할 수도, 또 그런 공부들의 의미도 없을 것인데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아이가 엄마에게 ‘나는 누구야?'라고 묻는다면 그 아이는 이상한 아이가 된다. 그것은 엄마도 모르고, 아빠도 모르며, 유치원 선생도 모르는,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대강하다 말면 모를까, 지속적으로 물어온다면 그 아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킬지도 모른다. 그 질문이 그들 모두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공부의 순서는 ‘나는 누구인가’부터 시작해야 한다. 말을 배우고 나면 바로 시켜야 할 공부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놀이처럼 그 공부를 시켜야 한다. 그들은 당장에 그 의문을 풀어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놈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즐겁고, 화도 나고, 슬퍼지고, 밥 먹고, 재미있게 놀고, 잠도 자는, 바로 그놈이기 때문이다.
‘간장 맛이 짠 줄만 알면’ 깨우침이 가능하고, 그것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란 말을 가슴에 새겨보자.
기독교는 ‘사랑’을 가르치기에 앞서 ‘나는 누구인가’를 깨우치게 하고(가르쳐선 안 된다), 불교는 교리 공부에 앞서 견성(見性)을 우선시하고, 유도(儒道)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앞서 성리(性理)부터 깨우치게 해야 한다.
선도(仙道) 역시 다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조건 의수단전(意守丹田)을 권할 것이 아니라, 그 의수단전을 하고 있는 그놈을 회광반조(回光返照) 하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하면 천하의 바보도 십년공부에 신선(神仙)이 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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