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견성 본문

달과 손가락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견성

thedaywemet 2018. 5. 6. 17:41

우리는 두 개의 의식(意識)을 교차하면서 살고 있다. 체(體)는 순수의식, 즉 내부(內部)의식이 맞지만, 육근(六根; 眼耳鼻舌身意)을 관장한 현재(顯在)의식, 즉 외부(外部)의식이 그 용(用)을 맡아 주인 행세를 하며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의 비극인 어리석음, 탐심, 성냄 모두가 외부의식에서 연유한다는 것에 이의는 없지만 내부의식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다 할 수 없다. 비록 내부의식의 성향이 선악분별이 없고 늘 如如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깨달음이란 단단히 자리잡은 외부의식 진영을 통과하여 내부의식의 고지에 있는 통제부를 장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내부의식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진치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주체를 에고(외부의식)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육근(六根)의 대부분이 외부의식의 지휘아래 있으며 그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우리는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편안한 내부의식 자리에서 탐진치 게임인 외부의식을 굽어 보며 살고 있다.


그 사실을 바로 깨우치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그 후부터는 탐진치에 속박된 듯한 이 모습은 단지 강 건너 불구경이며, 꿈 속의 허덕임을 알아채게 되는데, 그것이 자각(自覺)이다.


우리 의식의 본체는 본래 순수의식 자체이므로, 그것(깨달음)을 위해 우리가 따로 애쓸 필요는 전혀 없다. 


선가(禪家)의 방하착(放下着)이나 선도의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라"의 가르침이야말로 정곡을 찌른 혜안(慧眼)의 말이다.


우리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 탐진치의 포로이며, 강제 노역을 할 수밖에 없고, 평생을 투쟁해도 그 수용소에서 빠져나올지 말지 모른다는 그 착각 말이다. 


깨우침은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착각을 바로 잡기만 하면 된다. 그 후부턴 만사가 오케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극락이요, 지상낙원 천국이라는 사실, 극장 로얄석에 앉아 와인을 기울이며 내가 출연하는 스크린 속 영화를 보고 있음을 알아채게 된다. 


그것을 위해선 단지 시선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내 시선이 스크린에 빠져 있는 한, 나는 그림 속 등장인물과 똑같이 느끼고 똑같은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여기 춥지도, 덥지도, 바람불지도, 비가 오지도 않는 이 자리에 편하게 앉아 있다. 그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벗어난다. 그것이 대자유이며, 예수가 말한 Kingdom, 시타르타의 nibbana, 힌두들이 말하는 moksha이다.

728x90
반응형

'달과 손가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가는 길  (1) 2018.05.09
고요함  (1) 2018.05.09
나는 존재하는가?  (1) 2018.05.06
먹어봐야 맛을 알지  (1) 2018.04.05
깨우침을 위한 쉬운 요령  (2) 2018.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