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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왜 명공(命功)이 필요한가?

thedaywemet 2020. 8. 22. 08:00

마음공부를 한다는 사람들은 그것에 몰두 되어 몸이나 나머지 것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못한다.
 
마음공부는 유행이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관심에서 사라진다. 과거 멀쩡한 사람들이 '라즈니쉬(Rajneesh)', '라즈니쉬' 하며 인도로 달려갔었는데, 지금은 '오쇼(Osho)'라고 이름을 바꾸었어도 시큰둥 한다.
 
식을 줄 모를 것 같던 실바 메소드(Silva method)는 그 일부를 시크릿(the Secret)이란 이름으로 편집해 세상을 쓸고 지나갔고, 인도 리시케시에 있던 마하리쉬 마헤시(Maharish Maheshi)의 초월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본부의 터는 잡초만 무성하다.
 
칭하이 무상사(Supreme Master Ching Hai)는 죽었다던 그의 스승 다카르 싱(Thakar Singh)이 한국을 다녀가고 나서는 존재감이 없어져 버렸고, '아바타'와 'Oneness'도 반짝하고는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간화선(看話禪)은 불교의 그늘에서 명맥은 아직 살아있으나 남방불교 위파사나의 위세에 눌려 숨을 헐떡이고 있다.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낮은 얼마 안 가서 밤에 자리를 넘긴다. 아무리 명징(明澄)한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원래의 어둠으로 다시 돌아가듯이 말이다.
 
그리도 강조하던 그 강렬했던 깨달음 체험도 "온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이치(理致)를 이기지 못한다.
 
이제 성명쌍수(性命双修)에 힘입어 에너지(氣) 공부가 고개를 들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불교 기독교가 쓸고 간 자리에 숨어 있던 선도(仙道)의 싹이 돋아나듯이 말이다.
 
오온(五蘊)이 공(空)하다고는 했으나, 에너지(氣)는 빼고 설명을 했으니 역시 재점검을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이 되고 말이다.
 
모두 마음공부를 말하고는 있으나, 세상에 마음보다 더 허망하고 못 믿을 것이 있을까? 아침에 좋았다가 저녁에 싫어지는 것이 마음이며, 그것이 없이는 못 산다 했다는 그것 때문에 못 살겠다 하는 것이 마음이 아니던가?
 
조만간 성(性) 공부만을 제일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명(命) 공부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적어도 명(命) 공부는 자리를 잡으면 살아 있는 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명 공부의 특징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단전(丹田)에 한번 기운이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거의 영구적이다. 마치 어려서 배운 수영과 자전거 타기가 나이 들어도 없어지지 않듯이 말이다.
 
이(理)라는 것은 기(氣)가 따라주고 받쳐주지 않으면 행세를 못 하게 되어있다. 성리학(性理學)에서는 그것을 이발기수(理發氣隨)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한다.
 
거기에 성명쌍수(性命双修)의 근거가 있다.
 
몸이 없이는 마음은 힘을 쓰지 못한다. 깨달음 역시 흐지부지해지고 만다. 보임(保任)도 에너지가 없으면 시작도 하기 어려운 것이다.
 
깨달음도 명(命)이 든든하게 받쳐주지 않으면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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