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코드(code) 본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딘가 모르게 호감이 가고 죽이 잘 맞을 때, 보통 '코드(code)'가 맞는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chemistry'라는 단어를 사용해 약어(略語)로 '케미(chemi)'라고 하는데 공통점, 친근감, 친화력을 말하며, 뭔가 통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궁합(宮合)이 맞는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요즘은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사업 파트너, 스승-제자 사이에도 함께 쓰입니다.
특히 사제지간(師弟之間)에는 코드가 맞아야 합니다. 케미가 맞지 않으면 공부의 진전이 늦고, 더러는 실패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 한쪽이 다른 한쪽에 숙여 들어가 코드를 맞춰가기도 하지만, 근본 코드가 맞지 않으면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기는 어렵습니다.
코드가 맞는 경우는 최상입니다. 피차간에 긴 이야기가 필요 없습니다. 한 가지를 가르치면 두 가지를 이해하고, 쓸데없이 앞질러나가는 법도 없습니다.
특히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깨달음 공부를 할 때는 특히 케미가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지를 아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왠지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우며, 가르침을 통해 막혔던 속이 뚫리는 것 같은 감(感)을 느낀다면 코드가 맞는 것이고,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두세 번 설명을 들어도 아리송하기만 하다면 코드가 안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녀 간도 그러하지만, 코드가 맞지 않는데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짜증 나는 일입니다. 발품을 더 팔아서라도 나하고 더 케미가 맞는 스승을 찾아 나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공력(功力)을 가졌다 할지라도, 내가 받지 못하면 무소용(無所用)입니다.
세상엔 급수별로 수많은 스승이 있으며, 신기하게도 딱 나하고 수준이 맞는 스승을 먼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사는 나의 그릇 크기만큼 구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일승법(一乘法)으로 단번에 그 자리(見處)에 이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누구에게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을 거쳐서 깨달을 수 있고, 더러는 세 번, 경우에 따라서는 말도 안 되지만 미신(迷信)을 숭상(崇尙)하는 선생들을 두루 거친 후 간신히 본류(本流)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인연이 안 되어 영영 본 괘도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기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음 생(生)에 만나자"란 말은 그래서 나온듯합니다.
(일승법: 직통법, 우회 없이 단번에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 소승(小乘), 즉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이승에 대하여 대승(大乘)에서 자신의 입방을 나타낸 것이다. 조사선(祖師禪)에서 주로 쓰인다)
그래서 전생(前生)의 공덕(功德)이니, 삼생(三生)의 인연(因緣)이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이야기도 있는 것입니다.
공부의 성공은 스승의 역량(力量)도 역량이지만, 제자가 얼마나 자기를 비우고 스승에게 귀의(歸依)할 수 있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합니다.
자신감이 충만한 강한 성정(性情)을 가진 스승은 자신의 공력(功力)을 사용해 제자의 공(功)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일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스승 곁에 머물 수도 없으며, 언젠가는 홀로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부부 관계와 흡사합니다. 케미가 맞으면 더없이 행복하지만, 코드가 안 맞으면 답답할 뿐입니다.
코드가 맞고, 케미가 맞는 스승이 내게 있다는 것은 행운(幸運) 중에 행운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