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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살아있는 사람의 관심사는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이다. 별 관심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많지만 말이다. 그 둘이 모든 불안(不安)의 시작이다. 불안의 중심은 죽음이며, 그것이 고통을 부르는 제1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이다. 신앙처럼 편한 것은 없다. 그것이 신앙이 세상에 만연하는 이유다. 어렵게 따지지 말고, 그냥 믿어버리면 만사 오케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盲信)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수행(修行)이라 한다. 세상에 종교라 불리는 많은 신앙이 있는데, 용도는 단지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것에 안주하면 임시적이지만 평안을 얻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
'해탈(解脫)'이란,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란 설명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는 자가 없는 해탈은 무의미하다. '열반(涅槃)'은 해탈과는 다른 말이다. 열반은 죽음, 에너지의 불이 꺼진 상태, 원인이 무효가 된 상태 원래의 상태(無)로 돌아간 상태, 알아차리는 자 역시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해탈인가 열반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다. 선도(仙道)가 바라는 것은 해탈이다. 선도는 모든 일이 중심에 ‘내’가 있다. 선도는 무아(無我)를 말하지 않는다. 선도는 누군가를 신앙(信仰)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동일하게 진행된다. 자본주이냐 사회주의냐, 개인소득중심경제냐 전체소득중심경제냐, 수구(守舊)냐 개방(開放)이냐 등등 말이다. 그것은 신앙(信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독(基督)을 말하자면 구교(舊敎), 신교(新敎), 불도(佛道)라면 상좌부(上座部), 대승(大乘) , 아니면 선불교(禪佛敎), 이슬람이라면 시아파, 수니파로 나누어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사람은 완전한 깨우침을 얻기 전에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구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자. 이 사안(事案)은 전에도 다룬 적이 있으나, 엄연히 다른 두 단어의 의미..
싯다르타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래서, 고생을 벗어나려면 그를 따라 비구(比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고생, 영원한 안정은 없다. 모든 만족은 모든 불만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지금의 만족도 결국은 고통으로 변한다." 그것이 그가 주장한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의 주장, "고(Suffering)의 근본적 해결은 무(無)로 돌아감 밖에는 없다" 그 말에도 일리(一理)는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을 달든, 열반은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모두 태우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탈(Moksha)이지, 열반(Nibvana)이 아니다. 열반(涅槃)은 소멸(blowing out; extinguish), 즉 생명의 불이 꺼져 흔적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
죽음을 영어로 'Passed away'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스님이 죽으면 '열반(涅槃)하셨다'고 합니다. 열반(Nibbana; Nirvana)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열반에 대해 불교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번뇌(근심 걱정)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열반과 해탈(Moksha)을 혼용합니다. 하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해탈은 벗어남, 대자유이며, 석가가 말한 번뇌는 완전한 소멸(消滅)입니다. 석가는 생노병사(生老病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위와 처자를 버리고 비구(比丘)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며 그것을 '고(Suffering)의 해결'이라고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제..
힌두이즘은 설명이 다채롭고 화려하며, 신비스럽게 포장되어 있다. 다양한 비유 및 상징, 힌두신들과 인간과의 교감, 감동적인 영웅의 서사시, 산야신들의 신에 대한 헌신, 깨달음이 인간 삶의 목적인 것, 그리고 깨달을 때까지 윤회하는 것 등, 수행자가 아닌 일반 대중을 그 사상(신앙)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 매력(?)을 지닌 힌두이즘을 Background에 둔 요가와 선도를 비교한다면, 선도의 첫인상은 다소 지루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선도는 일견 무뚝뚝해 보인다. 보기에 따라서는 불친절하거나 퉁명스럽다고 느낄 수 있다. 설명이 군더더기 없이 절제되어 있어서 직접 체험이 없으면 그 맛을 알기가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요가의 수행자는 '지복(Ananda)' 속에 있게 ..
해탈과 열반은 결론부터 말하면 다른 말이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혼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해탈(解脫)은 어원이 산스크리트어 'moksha'이며, 그것은 '삶에 닥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대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어떤 일도 고통이 되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신의 장난(릴라; lila), 헛것(幻)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마쳤기 때문이다. 열반(涅槃; nirvana)은 시타르타(佛敎)의 새로운 개념이다. 그것을 단지 번뇌가 모두 사라진 상태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기엔 미흡하다. 그것은 소생이 불가능하게 된 생명의 완전한 소멸이다. 거기에 윤회(輪廻)는 붙을 여지가 없으며, 힌두의 해탈과는 개념부터 다르다. 초기불교는 혹 깨달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초장(수다원, 사다함)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