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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무아(無我)'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다. 자기를 아는 사람을 가리켜 지성인(知性人)이라 한다. '나'는 정기신(精氣神), 즉 육체와 에너지(氣) 그리고 정신(의식)으로 구성된 종합체이며, 쉼 없이 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며,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나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없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표할 만한 것은 '의식(意識)'이다. 어떤 의식을 가졌느냐가 나의 가치이며, 그것이 우리가 공부해야 하고, 깨우침을 얻어야 할 이유다. 의식은 공부량에 따라 진보하며 영원한 존재다. 그것은 육체가 흩어져도 에너지가 끊겨도 없어지지 않는다. 살아서 몸과 에너지를 어떻게 관리했느냐에 따라 사후의 나는 다른 존재가 되..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다. 지구에 있는 동안 빌려 쓰는 것이다. 빌려 쓰는 것이니 함부로 하지 말고, 잘 쓰다가 되돌려놔야 한다. '나는 없다(無我)'라는 주장이 있다. 일견(一見) 있어 보이는 주장이다. 그 말은 몸과 마음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평안을 준다. 그렇다면 나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놈은 누구일까? 몸과 마음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는 그놈은 누구인가? 늘 몸과 마음을 지켜보던 그놈은 누구인가? 과연 몸과 마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왔던 원동력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 원동력은 무엇에 근거해 존재하는가? 정말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는가? 선도(仙道)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 그 원동력을 기(氣)라고 하고, 氣는 의식(神)에 근거해 작용한다고 안다. 선..
의식(意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이란, "자기 자신(自我)이나 대상(세계)을 알아채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없어지면, 나도, 세계도 없어진다. '깨어있다'는 말은 의식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이란 정견(正見)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식을 버려선 안 된다. 즉, 의식적(意識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몸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사라졌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아채는 놈이 있다. 그놈이 '나', 즉 의식이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이 깊어지면 단전과 나만 남게 된다. 물론 단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알아채면서 말이다. 알아채고 있는 그놈은 누구인가? 불교(佛敎)에서 멸진정(..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에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깊은 잠과 같다고 생각하면 두려울 리가 없다. 또 하나,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나'라는 소중한 것이 잊히기 때문이다. 죽는 사람들의 공통된 기대는 자기가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이 사라지면서 에너지 공급이 정지하고, 몸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부활(復活)과 윤회(輪迴)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眞理)가 아니다. 사람이 의식을 잃어도 에너지가 공급되면 그는 산 자이다. 몸은 죽어도 혼(魂)은 죽지 않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을 우리는 귀신(鬼神)이라고 부른다. 상당한 혼령(魂靈)들은 아직 우리의 곁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에너지를 잃어..
인식(認識)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아는 일'이며, 의식(意識)이란 '인식의 작용'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인식의 상위개념(上位槪念)이며, 의식이 없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은 뇌(腦) 작용의 산물이지만, 의식은 뇌하고는 관계가 없다. (물론 唯物論者들은 그것도 뇌의 범주라 말하겠지만...) 인식의 양(量)이 많은 자를 가리켜 지식인이라 하고, 의식을 깨우친 자를 '깨달은 자'라고 한다. 오는 세계에서 인식은 기계(AI)의 영역이 된다. 사람이 결코 기계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영적(靈的)이며, 의식을 깨우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나마 그것이 희망적이다.
의식(意識)이란 원래가 순수한 것이며, 그 순수성을 영(靈)으로 알아채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한다. 의식은 순수하므로, 무엇과 만나더라도 그것과 하나가 되고, 곧 그것의 성질을 띄게 된다. 하지만 의식 하나만을 보면 그것처럼 순수한 것이 없다. 그런 차원에서 순수의식,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못된다. 의식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구(不垢), 부정(不淨), 부증(不增), 불감(不減)하다. 선도(仙道) 수련이란 더 순수할 수 없는 의식과 무엇으로도 오염이 불가능한 에너지(氣)를 통합시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3요소는 정기신(精氣神), 즉 물질적 차원의 이 몸과 호흡으로 연결되는 에너지, 그리고 의식이다. 선도가 무르익은 사람은 시간이 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때, 화막(Screen)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영상을 따라 울고 웃을 뿐입니다.영사기가 멈추면 비로소 스크린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잠시 전에 비가 오고 화산도 폭발했지만, 스크린에는 흠집 하나 없습니다.순수의식을 체험하고 나면, 그것이 빈 스크린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하지만 그것이 나를 만들고, 세상을 만드는 본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빛을 비추면 화면에 온갖 것들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우리들은 매일 그 소중한 것을 지나치고 삽니다. 의식하는 놈은 의식(意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사가 온통 돈과 편안함에만 있으면, 은연중 자기가 서서히 지워져 가는 우울함이 있습니다. 온갖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는 일상사 가운데서 자기가 자성(自性)에 얼마나 ..
죽음이란 정기신(精氣神), 즉 몸과 에너지 그리고 의식이 해체(解體)되는 것이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에너지는 흩어지고 만다. 그런 상태에선 당연히 번뇌(煩惱)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Nirvana(涅槃)라고도 한다. 죽은 후 남은 것은 인식(神)뿐이다. 그것이 나이며,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이다. 엄밀히 말해 '나'란 것은 인식력이다. 인식은 창조력이며, '나'라는 존재의 핵이다. 하지만 그것(認識)만 가지고는 살아있다고 할 수가 없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에너지이다. 죽은 자에게는 에너지가 없다. 그것은 마치 Battery가 방전(放電)되어버린 자동차와 같다. 그것은 자동차이지만 자동차라고 할 수가 없다. 자동차로서의 기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에너지(氣)가 없다면 알아차림도..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내가 아닌 것을 내려놓으라' 했습니다. 우선 내 몸과 내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이것은 생각도 아니고, 느낌도 아닙니다.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무엇인가 있으려면 이것이 있어야 하며, 없으려 해도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상심입니다. 이것을 찾는답시고 애쓰지 마십시오. 이것은 한번도 나를 떠나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나도 없으며, 이것이 있어야 나는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존심도, 자존감도, 나는 아닙니다. 그것 역시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자, 이제 나는 누구입니까?
죽은 영(靈)은 그저 영(soul, spirit)으로만 존재할 뿐, 작용(作用)은 하지 못한다. 작용을 위해서는 살아있는 에너지(氣)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성의(誠意)를 내어 정체성(깨달음)을 회복하고 에너지(氣)를 지켜야 한다. 죽고 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귀신(죽은 靈)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빙의(憑依)하려는 이유는 사람의 몸을 빌어야만 그들 존재를 나타내 역사(役事)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맑은 정신에 주체성이 뚜렷하거나, 에너지(氣)가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접근할 수가 없다. 그들의 기운은 매우 미약(微弱)해서 인간이 가진 방어의 氣를 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신이 혼미 되어 있거나, 에너지가 난조(亂調)를 이루는 사람을 노려 그들에게 침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