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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때, 화막(Screen)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영상을 따라 울고 웃을 뿐입니다.영사기가 멈추면 비로소 스크린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잠시 전에 비가 오고 화산도 폭발했지만, 스크린에는 흠집 하나 없습니다.순수의식을 체험하고 나면, 그것이 빈 스크린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하지만 그것이 나를 만들고, 세상을 만드는 본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빛을 비추면 화면에 온갖 것들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우리들은 매일 그 소중한 것을 지나치고 삽니다. 의식하는 놈은 의식(意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사가 온통 돈과 편안함에만 있으면, 은연중 자기가 서서히 지워져 가는 우울함이 있습니다. 온갖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는 일상사 가운데서 자기가 자성(自性)에 얼마나 ..
죽음이란 정기신(精氣神), 즉 몸과 에너지 그리고 의식이 해체(解體)되는 것이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에너지는 흩어지고 만다. 그런 상태에선 당연히 번뇌(煩惱)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Nirvana(涅槃)라고도 한다. 죽은 후 남은 것은 인식(神)뿐이다. 그것이 나이며,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이다. 엄밀히 말해 '나'란 것은 인식력이다. 인식은 창조력이며, '나'라는 존재의 핵이다. 하지만 그것(認識)만 가지고는 살아있다고 할 수가 없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에너지이다. 죽은 자에게는 에너지가 없다. 그것은 마치 Battery가 방전(放電)되어버린 자동차와 같다. 그것은 자동차이지만 자동차라고 할 수가 없다. 자동차로서의 기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에너지(氣)가 없다면 알아차림도..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내가 아닌 것을 내려놓으라' 했습니다. 우선 내 몸과 내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이것은 생각도 아니고, 느낌도 아닙니다.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무엇인가 있으려면 이것이 있어야 하며, 없으려 해도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상심입니다. 이것을 찾는답시고 애쓰지 마십시오. 이것은 한번도 나를 떠나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나도 없으며, 이것이 있어야 나는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존심도, 자존감도, 나는 아닙니다. 그것 역시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자, 이제 나는 누구입니까?
죽은 영(靈)은 그저 영(soul, spirit)으로만 존재할 뿐, 작용(作用)은 하지 못한다.작용을 위해서는 살아있는 에너지(氣)가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성의(誠意)를 내어 정체성(깨달음)을 회복하고 에너지(氣)를 지켜야 한다.죽고 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귀신(죽은 靈)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빙의(憑依)하려는 이유는사람의 몸을 빌어야만 그들 존재를 나타내 역사(役事)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맑은 정신에 주체성이 뚜렷하거나, 에너지(氣)가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접근할 수가 없다.그들의 기운은 매우 미약(微弱)해서 인간이 가진 방어의 氣를 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그들은 정신이 혼미 되어 있거나, 에너지가 난조(亂調)를 이루는 사람을 노려그들에게 침입해 그들을 광인..
살아있는 모든 것은 활동하는 에너지(氣)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활성화된 것만을 실존(實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도(仙道)가 에너지(氣) 수련에 애쓰는 것은 실존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의식(神)과 에너지(氣)가 분리된 것을 가리켜 죽었다고 합니다. 에너지를 잃으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仙道의 상급 공부는 신(의식) 공부입니다. 그것으로 에너지를 길러냅니다. 의식이 에너지를 머금고 있으면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았을 때보다 더 自由로운 행사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을 가리켜 신선(神仙)이라 합니다. 귀신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에너지를 운용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삶은 후회뿐입니다. 더 이상 수행(修行)도 할 수가 없기에, 살아..
생명이 시작되는 과정의 중심에는 '숨'이 있으며, 그것은 에너지(氣)의 전이이다. 그것은 심장(心臟)을 움직이는 원동이며, 의식과는 연기(緣起) 관계이다. 숨은 생명과 함께 시작(turn on)되는 의식 이전의 실제이다. 숨은 호흡과는 크게 다르며, 엄밀히 말해 태(胎)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올 때 호흡 속에 자리 잡아 호흡의 주체가 된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는 데 호흡의 공(功)이 가장 컸다는 것은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안정된 호흡은 의식의 깊은 차원, 즉 삼매(三昧; samadhi)를 불러오고, 그것은 깨달음의 실마리가 된다.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언급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의식을 호흡에 몰입시킬 때 일상적이지 않은 의식이 확보되는데, 인도 수행자들은 그것을 사선정(四禪定; 네 단계 삼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