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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내가 있기에 세상이 있고, 아름다움도 있습니다.'나를 모른다(잃어버렸다)'는 사람이 많습니다.그것을 찾기 위해 세상을 등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여기 이렇게 있는 '나'를 두고 말입니다.지금 여기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는 '이놈'이 내가 아니면 무엇이 '나'겠습니까?너무나 당연해 모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살지만 말입니다.나는 내가 있어서 행복합니다.내가 없으면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요, 들어도 듣는 곳이 아니요, 냄새도 없고, 맛을 알 수 없으며, 알아챌 수도 없습니다.왜 그(싯다르타)는 "나는 없다"를 주장했는지 짐작은 합니다.그의 주제는 '괴로움(苦)'이었습니다.그는 남들과 달리 병듦과 죽음이 두려웠고, 그것이 큰 고통이었습니다.죽음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들어 버리기 ..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기(Nothingness)를 바란다"는 사람이 있다.스스로를 "무아(無我)"로 세뇌하는 사람이다. 의욕(意欲)이 없다는 사람이 있다.그 말이 정말인지를 아는 방법은 그가 먹는지, 자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그것마저 없다면, 그는 정말 의욕이 사라진 사람이다. 그는 곧, 열반(Nothingness)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식욕, 수면욕, 성욕이 있으며, 나아가 소유욕, 권력욕이 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사람을 보았는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상상 속의 붓다(Buddha)일 것이다. 하지만 붓다란 '자기가 누군지를 알아챈 사람'이다.자기 속에 있는 욕구까지도 말이다. 사람들은 더 큰 것을 소유하기 위해 작은 것을 버린다.사람들은 그에게 속아 작..

스나이퍼가 일을 할 때는 가급적 장애물 없이 타켓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해야 한다. 깨달음(見性)을 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각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으므로, 헷갈리다가 잘못되면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깨달아야 할 것은 한둘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키워드 하나만 확실하면 연쇄해서 하나하나 풀린다. 1700 공안(公案) 중 하나가 열리면, 나머지가 모두 열린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단연 공안의 대표는 "이뭣고", "나는 누구인가"일 수밖에 없다. 무아(無我)니, 연기 중도니, 열반이니, 하는 4차원적인 말들은 나중에 살펴도 된다.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 무상(無常)한 것, 시공(時空)에 묶여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제하여 본다..

'해탈(解脫)'이란,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란 설명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는 자가 없는 해탈은 무의미하다. '열반(涅槃)'은 해탈과는 다른 말이다. 열반은 죽음, 에너지의 불이 꺼진 상태, 원인이 무효가 된 상태 원래의 상태(無)로 돌아간 상태, 알아차리는 자 역시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해탈인가 열반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다. 선도(仙道)가 바라는 것은 해탈이다. 선도는 모든 일이 중심에 ‘내’가 있다. 선도는 무아(無我)를 말하지 않는다. 선도는 누군가를 신앙(信仰)하지도 않는다.

여기 빚을 진 사람이 있습니다.그는 헤어나기 위해 소비를 최소화하고, 10년 동안 고생 고생해서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하지만 얼굴에 철판 깔고 오래 버티면 빚을 안 갚고도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얌체 같은 짓이지만 말입니다.그것 역시 10년이면 얼추 해결됩니다.Bible(에페소서 2:8,9)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그 말은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아멘, 믿습니다"만 반복하면 구원받는다 합니다.그래서 신도들이 목사 설교 중에 그 소리를 크게 지르나 봅니다.우리의 생각, 말, 행위 모두는 업(業)이 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서라도 기필코 갚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 그것 때문이라..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동일하게 진행된다. 자본주이냐 사회주의냐, 개인소득중심경제냐 전체소득중심경제냐, 수구(守舊)냐 개방(開放)이냐 등등 말이다. 그것은 신앙(信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독(基督)을 말하자면 구교(舊敎), 신교(新敎), 불도(佛道)라면 상좌부(上座部), 대승(大乘) , 아니면 선불교(禪佛敎), 이슬람이라면 시아파, 수니파로 나누어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사람은 완전한 깨우침을 얻기 전에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구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자. 이 사안(事案)은 전에도 다룬 적이 있으나, 엄연히 다른 두 단어의 의미..

싯다르타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래서, 고생을 벗어나려면 그를 따라 비구(比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고생, 영원한 안정은 없다. 모든 만족은 모든 불만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지금의 만족도 결국은 고통으로 변한다." 그것이 그가 주장한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의 주장, "고(Suffering)의 근본적 해결은 무(無)로 돌아감 밖에는 없다" 그 말에도 일리(一理)는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을 달든, 열반은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모두 태우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탈(Moksha)이지, 열반(Nibvana)이 아니다. 열반(涅槃)은 소멸(blowing out; extinguish), 즉 생명의 불이 꺼져 흔적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

사후의 세계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마음에 담아 믿고 사는 사람도 있다. 사후를 주장하는 그 사람이 정말 죽음을 알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다. 죽음 뒤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이다. 열반(涅槃)을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어서 지옥을 피하기 위해 공덕을 쌓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꿈을 좇고 있을 뿐, 자기가 누군지 그 당체(當體)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실재(Reality)요,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끄달림들을 벗어나게 하고, 당장 극락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주체(主體)이니 말이다.

죽음을 영어로 'Passed away'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스님이 죽으면 '열반(涅槃)하셨다'고 합니다. 열반(Nibbana; Nirvana)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열반에 대해 불교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번뇌(근심 걱정)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열반과 해탈(Moksha)을 혼용합니다. 하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해탈은 벗어남, 대자유이며, 석가가 말한 번뇌는 완전한 소멸(消滅)입니다. 석가는 생노병사(生老病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위와 처자를 버리고 비구(比丘)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며 그것을 '고(Suffering)의 해결'이라고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제..

열반(Nibbana)은 모든 불교도가 바라는 기독교의 천국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신비)의 경지, 즉 완전한 고(Suffering)의 해결 자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열반(涅槃)의 의미는 생명의 불이 꺼진 상태, 즉 소멸(消滅), 멸절(滅絶)이다. 시타르타의 깨달음은 "'나'라는 실체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諸法無我)"는 것이었다. '나 없음(無我)'을 불교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三法印)로 받아들인다. 시타르타는 그것을 알아챔으로 고민하던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했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믿음을 내려놓고, 니체처럼 생각이란걸 해보자. 과연 그의 깨달음의 요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고통이 있을 수 있는지? 또한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죽어서 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