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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마술사는 Trick을 쓴다. 그는 그만의 Knowhow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그것을 공개할 수 없다. 그것이 그의 밥벌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은 있는 그대로를 공개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친절한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의 사물 바라보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술사는 눈속임에 능하다. 하지만 스승은 절대 누구도 속이지 않는다. 스승은 모든 것을 공개한다. 그것도 아주 쉽게...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그리되는 이유는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정적으로 기울게 되면, 세상에 내 편은 없는듯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수련 같은 거 하지 마. 그냥 살던 대로 살아"라고 누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그럴 때, 생각은 그만두어야 할 이유로 가득 차게 된다. 시간이 없어, 마음의 여유도 없지, 너무 멀어, 기름값도 올랐고... 재미가 없잖아, 도반(道伴) 중 마음에 드는 놈(년)도 없고, 따로 특별 대우도 안 해주고, 스승이란 사람의 짜증 나는 잔소리(프라이버시 침해), 그리고 뚜렷한 효과도 크게 없는 것 같고.... 게다가 초심(初心)은 간 곳이 없고, 수련을 지속해야 할 이유도 모호해진다. 백 사람이 수련을 시작하면 한 사람 정도나 남을까? 결국 수련을 밥 먹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만 남게 된다. 하루 수련을 못 하면 목욕 안 ..

먹다가 남은 것, 쓰다 남은 것, 이미 개봉한 것을 선물로 보내서는 안 된다. 사람에 따라 그것을 모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과거에 하인들에게나 하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처에서는 스승이 입던 옷이나 물건을 제자에게 주는 일이 많았고, 제자는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해 소중하게 간직하다가 다시 제자에게 물리곤 했다. 그것은 제자에게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다. 스승이 사용하던 물건에는 그의 에너지(氣)가 서려 있다. 상징적이지만 않다. 스승을 찾아 곁에 자주 앉도록 하는 것이 좋다. 공(功)을 지닌 스승 주위에는 기장(氣場: Energy Field)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그와 자주 만날수록 그의 에너지를 받게 된다.

대한민국 해군이 항공모함(航空母艦)을 가질 예정이란다. 마치 빈집에 소 들어가는 격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구축함 한 대 만들지 못하던 나라였었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은 일반적 군함과는 달리 전투기를 태우고 바다 위를 떠다니며 지구의 대다수 지역에서 군사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종합전투함이다. 스승이 있는 사람은 걱정이 없다. 스승은 항공모함과 같기 때문이다. 전장(戰場)에 나선 전투기에 있어 항공모함은 어머니와 같다. 항공모함이 없으면 급유는 물론 재무장을 할 수가 없다. 스승이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스승은 영원한 친구다. 스승이 없는 제자는 편히 쉴 모함(母艦)을 잃은 전투기와 같다.

스승과 선생은 다릅니다. 선생은 알음알이를 주지만, 스승은 인생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세상과 연관된 자잘한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사 제1번은 각성(覺醒)이고, 두 번째는 에너지(氣) 운용입니다. 진정으로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거나, 생명에 관심이 없다면 그를 만날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 깨달음처럼 쉬운 일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는 것처럼 이상한 일은 없으니까요. 생명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말과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그런 사람은 스승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깨달음을 일별(一瞥)하였다 할지라도 신뢰하는 스승에게 귀의(歸依)가 없는 한, 그야말로 일별에 그치고 만다. 그것은 거의 모든 각성자(覺醒者)들의 공통적 의견이다. 여기서의 스승은 물론 살아있는 선지식(善知識)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숨 쉬지 않는 경전(經典)이나 어록(語錄), 그리고 매체(媒體)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작용시키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물론 움직이기 어려운 귀한 인연(因緣)을 타고난 수행자에게는 예외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소주천(小周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의념주천(意念周天)이라면 모를까, 단전(丹田)이 깨어나고 여실(如實)한 기운에 의해 주도되는 소주천이라면 꼭 이미 주천을 이룬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깨달음의 인..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선도(仙道)를 선택하였는가?" 묻는다면 운명적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것은 마치 이과(理科)의 사람에게, "당신은 어찌하여 골치 아픈 수학을 재미있어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로 자성(自性)을 깨우치려 시도하는 공부법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에너지(氣) 공부를 통해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계합(契合)하는 공부다. 자아(自我) 탐구하는 법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에너지(氣) 수련법도 그 갈래가 수없이 많아, 문파별로 자기들이 하는 수행법이 으뜸이라고 하지만, 문외한이 볼 때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렇다면 세상엔 왜 수많은 수행법이 있는가? 그것은 각기 다른 많은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Mantra..

스승은 제자가 필요하고, 제자 역시 필요에 의해 스승을 만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승에겐 제자가 필요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스승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 주어 얻을 것이 점점 없어지기 시작해 나중엔 그에게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 스승은 빨리 눈치를 채고 제자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으니 이제 내 곁을 떠나거라" 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그 자리를 선선히 떠나줘야 한다. 그리되었을 때 스승과 제자의 좋은 관계는 영원히 지속된다. 하지만 그리되지 못하면 스승과 제자는 원수처럼 된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의 묘한 관계다. 하지만 스승도 공일만은 아니다. 스승은 언제나 제자의 몇 m 앞을 달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이 없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주소 없이 서울 김 서방을 찾는 것이다. 손에서 책을 내려놓아라. 책은 많이 읽을수록 망상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시작점에 한 끗발만 어긋나도 도착점에 가면 그 오차가 감당키 어려울 만큼 벌어진다. 믿을만한 스승 문하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길을 한번 잘못 들어서면 간 만큼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로 다툴 뿐, 수행이 먼저라는 생각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지금 당장 깨달을 수 있다. 깨달음은 수행이 필요치 않고,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당신은 이미 깨달아 있다는 말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