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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싯다르타는 명쾌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성이다. 그는 무상, 고, 무아라는 간단한 이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무상(無常)이 고(苦)를 낳지만, 무아(無我)라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너무 복잡하다. 파벌도 파벌이지만, 가르침도 상이하다. 간단히 無我라 알고 살면 쉬울 것을, 힌두로부터 진아(아트만)와 윤회를 끌어들인 것으로 부족해,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에 요가로부터 유식학(唯識學)까지 가져왔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미궁(迷宮) 속에서 쉼 없이 허덕일 것인가라는 기로(岐路)에 서야 한다. 진리는 쉽고도 명료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외부의 것, 즉 소유와 지위를 통해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려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늘 불안하다. 그것들은 무상(無常)하며, '나'와는 유리(遊離)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하지 않아도, 차지하지 않아도, 늘 나와 함께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다. 우리가 불행해지는 것은 관심을 외부로만 돌리기 때문이다. 가지지 않아도 나는 존재하지만, 내가 유명무실하다면 소유나 지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때 묻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그것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지금 당장은 몰라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무상(無常)처럼 멋진 것은 없다. 그것은 우리를 늘 새로움 속에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헌데, 그 無常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교리(敎理)가 있다. 어리석은 이에게는 그것이 허탈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無常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여가 만들어 낸다. 변화는 꼭 필요한 일이며, 그것은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좋고, 궂은날은 궂은날대로 좋지 않은가? 쨍한 햇볕이 필요하기도 하고, 구름 낀 날이 좋은 경우도 있다. 삶에는 본래 의미(意味)가 없다.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다. 意味는 본인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므로, 일체는 본인 책임이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사는 사람, 그에게 평온은 없다. 오매일여(寤寐一如) '나'는..
누가 지구를 허공에 매달았었던가? 누가 파란 하늘을 만들고, 바람과 구름을 몰아오는가? 누가 시냇물을 흐르게 하고, 꽃들이 피어나게 하는가? 그리고 아이의 맑은 웃음은 어디에서 올까? "이것"이 없다면 그런 궁금함인들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재물과 권력, 명예 그리고 학식(學識)에 생애를 바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것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이 "나"를 지켜주진 못한다. 단언컨,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다. 그것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 궁극적인 만족은 없다. 오직 회광반조(回光返照)를 통해 자기를 깨우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제서야 우리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세계를 떠나, 꺼지지 않는 만족,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은 참 이상도 하다. 같은 깨달음을 얻었어도 한쪽은 낙관적(樂觀的)으로 즐겁게 살고, 다른 한쪽은 비관적(悲觀的)으로 자기를 괴롭히며 산다. 한쪽은 인생의 밝은 면을 비추며 다소 괴로운 일이 있어도 무상(無常)의 이치에 따라 즐겁게 살고, 다른 한쪽은 인생은 '결국 고통뿐(一切皆苦)'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고, 괴로움을 낙(樂) 삼으며 살아간다. 한쪽은 무아(無我)를 모두가 하나(Oneness)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늘 감사하며 베풀어 가며 살지만, 다른 한쪽은 일체가 허망(虛妄)하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겨가며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 신앙(信仰)하며 산다. 한쪽은 살아있는 동안 험한 형편이나 다소 병약한 체질을 바꾸며 건강하게 살아가지만, 다른 한쪽은 삶에 대한 염세적(厭世的) 태도로 죽지 못해서 ..
한국어에서 단순히 '안다'로 말해지는 것에 대해 영어권 사람들은 know, see, get, have, understand, realization, cognition 등등 그 표현이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know와 see의 차이는 하늘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하늘과 땅은 붙어 있어 사실상 구별이 모호하지만 그 둘을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보통 'I know'와 'I see'를 두리뭉실 혼용하지만 따져보면 그 차이가 천지보다 더 큼을 알게 된다. 같은 "안다"는 말이지만, know는 속세(俗世)의 표현법이고 see는 출세간(出世間), 즉 깨달음의 언어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볼(see)때 단순히 보지(just look) 않고 기존의 지식으로 여과하여 저장한다. 즉시 과거형으로 바뀌는 속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