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대화 없이 진보 없다 본문

和光同塵

대화 없이 진보 없다

thedaywemet 2019. 12. 20. 08:00


깨달음에는 등급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글을 통해서 오디오나 영상물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선 스스로 그것이 모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더 해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네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일곱 번의 생을 더 닦아야 아라한이 된다는 예류과(豫流果) 수다원, 한 번만 세상에 더 왔다 가면 아라한이 된다는 일래향(一來向) 사다함, 세상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불래(不來) 아나함, 마지막 지위 최고의 극치(極致)를 무적(無敵) 아라한이라 했습니다.

도반(道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러 부족한 점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 하였으니, 깨달은 후 닦을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장에서는 의견교환을 넘어서서 논쟁으로 발전시키거나 인신공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울컥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후회합니다. 어찌 되었든 한 판입니다. 경솔하면 아쉬움이 남게 마련입니다.

또한 인터넷 공간일수록,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절대로 반말을 사용하거나 상대를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쓴 글만 가지고 이성적으로 논해야 합니다.

"내 말을 못 알아듣다니 한참 모자란 사람이야!"라고 타인을 생각하거나, 꼼짝 못 할 약점을 발견하기 위해 그가 쓴 글들을 뒤져서도 안 됩니다. 

그는 부족한 나를 상대해 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가 없다면 나 역시 없으며, 그가 폄하되면 나 역시 별 볼일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다원은 일곱 생을 거듭나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일곱 번 자신을 더 통찰하라는 말이라고 해석합니다. 

잠시 쉬었다가 대화를 일곱 번 더 하라는 말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공부가 깊어져 한 번만 더 고찰하면 깨우침이 무르익는 단계, 대단한 존재이지요. 그것이 사다함이라고 나는 풀고 싶습니다.

나머지... 세상에 다시 올 필요가 없다는 아나함이나, 적이 모두 사라진(無敵) 아라한에 관해선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극락(極樂)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논쟁이 되었다면 마음으로부터 정중히 사과하면 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도 다시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때 당신의 깨달음은 한 단계 승급합니다. 

세상 모두가 부처로 보이게 될 때까지 공부처를 버리지 마세요. 그래야 '마땅히 공경 받는다(應供)'는 아라한에 오르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깨달음에는 층차(層差)가 없습니다. 있다면 허공(虛空)에 당신이 그어 놓은 금에 불과합니다. 어서 어서 대화의 장(場)으로 돌아오세요. 거기서 자기의 모든 경계를 털어 놓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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