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거기엔 나와 너, 선과 악, 안과 밖, 오고 감이 없다. 본문
수행 초기에는 수행의 주체가 ‘나’이다. 수행의 주체인 내가 수행의 ‘대상’을 관(觀)한다. 그러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 주체와 대상이 사라진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알고 모르고가 없다. 일체가 성품(性品)을 잃고 오직 인연생기(因緣生起)만 남기 때문이다. (만물은 자체의 성품이 없다)
오직 ‘알아차림’만 남는데 우리는 정확히 이것이 무엇인지 좀처럼 알기가 쉽지 않다. 안목이 열리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한데, 눈이 눈을 볼 수 없듯 주체가 되는 이것은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을 ‘모를 뿐’이라 하였다.
한없이 펼쳐지는 적적한 그 자리에는 자타(自他), 선악(善惡), 내외(內外), 래거(來去)가 없다. 그것들(나와 너, 선과 악, 안과 밖, 오고 감)은 마음이 그렇다하여 그럴 뿐, 당체(當體)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알아차리는 ‘이것’만이 실재(實在)이다. 이것이 없이는 ‘나’라는 존재 자체도 없고 어떠한 인식도 불가능하다.
허지만 비록 개념이나 이름 내용은 없지만...만물은 이것으로부터 생겨나며(無名, 天地之始), 그래서 이것을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 마음, Atman이라 일컫는다.
만상(萬象)은 ‘단지 이름이 그럴 뿐 실재한다고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단지 언어와 개념(생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물을 범주화(有名, 萬物之母)하면서 만상을 생겨났으므로...
이것을 노자는 ‘현(玄:그윽하다)이라 부르며 신비하며 신비하며 만물이 들고나는 문(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이라 하여 이것을 알기 원한다면 마음(생각)을 내려놓으라(故常無慾以觀其妙) 하였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오직 유일신(唯一神)’만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부처가 ‘만상은 남김없이 허망하다(凡所有相皆是虛忘)’고 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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