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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와 요가

[선도] 불도와 선도

알아챔 2017. 3. 1. 17:26

선불합종(仙佛合宗)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佛敎)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선도(仙道)와 서로 교류하며 생겨난 말이다. 그 둘은 추구하는 바가 대동소이한데다가 당시 주류를 이루던 선도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 불교입장에서 포교에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수 있다. 선불합종의 결과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능엄경과 선불교이다. 능엄경을 보면 누가보아도 상당부분이 선도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음을 안다. 선불교(禪佛敎) 역시 그러하다.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와는 사뭇 다르며 그 중심부에 상당부분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달마의 구년면벽 공부는 거의가 선도(仙道) 공부였다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이후 그는 선불교의 태조가 되었으며, 그의 죽음 역시 장난스러운 선도식(仙道式)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불교의 형성에서 선도의 가장 핵심적인 기()의 개념을 빼 놓았을까 그것이 늘 의문스럽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추측컨대 최소한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까지 접목해버리면 본래불교 모습이 너무 퇴색해 버리고 말테니 말이다.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이미 새로운 것들을 너무나 많이 흡수하여 초기불교의 모양이 아니었다. 용수(龍樹)의 중관(中觀), 그리고 유가(Yoga)학파의 유식철학이 깊숙이 가미되어 있었고, 게다가 중국에 와서 기존교리에 영향을 주는 선불교가 득세를 이루게 된 마당에 선도의 핵심인 기철학(氣哲學)까지 받아들이면 주객이 전도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불도수행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수행에 기()를 응용하는 것은 공부에 매우 유리하다. 오랜 세월 불도수행자들 사이에 단전(丹田) 등 선도공부가 도입되어 왔으며,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선불교의 최고지도자 스님이 적극적으로 간화선(看話禪)에 단전호흡을 응용하라고 적극 권장하는 수준이다.

 

나는 불도가 적극적으로 선도의 기철학(氣哲學)을 불교화해 주기를 권장한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의 선불교(禪佛敎)가 세계수행의 중심자리에 서게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사실상 요가와 위빠사나, 그리고 티벳불교가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들을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선불교가 세계적으로 그리 각광을 받지 못하는 지금 말이다.

 

한마디로 수행은 어떻게 삼매(三昧)를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며, 이어서 알아차림과 대상이 어떻게 연결을 이루어 새로운 창조를 해내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알아차림과 대상의 조화에서 본래면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도(佛道)와 선도(仙道)는 수행상의 큰 차이가 있다. 선도는 견성(見性)에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밝음을 추구하며, 알아차림과 대상 사이에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것이 부드럽게 알아차림과 대상의 이질감을 해소하고 일체감을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최상승선 직지인심(直指人心) 공부를 할 때 응용해주기를 바란다. 많은 수행자들의 어려움은 알아차림과 대상이 서로 대치하고 있어 수행의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함이다. 그리고 초견성(初見性)을 이루었을지라도 대부분 수행자가 다시 어두워지는 이유는 에너지의 부족이라 본다. 각성의 유지(維持)에 에너지보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약 지금이라도 불도가 말 그대로 선불합종의 취지에 입각하여 선도를 받아들여 수행에 적용한다면 아마도 한국 선불교가 온 세계를 뒤덮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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