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깨우침도 인연따라 본문
스트레스의 삶 속에 살면서 가끔은 고요히 앉아 기도와 명상에 잠기는 것은 건강에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도 세상도 피해서 골방에 들어가 그 짓만 하고 싶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체험이 있었든, 아니든 간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하다는 선정(禪定), 즉 "사마디(samadhi)"에만 마음이 묶여 있다면 이른바 방석 중독이다.
각설하고...
그들이 숭상하는 싯다르타는 사마디의 극점(極點)까지 이르고는, 그것으로 부족하여 고행(苦行)에 들어갔고, 나중엔 그것마저 아니란 결론에 이르러 목욕과 우유 죽의 편안함을 택했다고 전해온다.
禪定이란 자기 자신에 관심을 가지기만 하면, 일하든, 길을 걷든, 앉았든, 누웠든,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다.
자기를 보는데 무슨 별도의 의식이 필요하단 말인가? 거기엔 신불(神佛)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고요히 앉아 있을 때만 禪定에 들었다가 생활로 돌아오는 순간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 집착에 빠진 사람들 때문에 몸마저 불태워 없애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세상도 버리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이라면, 그것보다 더한 몰상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핵심은 자각(自覺)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자기를 깨우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깨달음(見性)에 이르는 길이라는 고집만큼 무식(無識)한 것은 없다.
모두 버려야 한다, 이렇게 앉아야 한다, 이런 수행을 해야 한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이런 걸 보아야 한다, 나는 이것으로 축복받고 이것으로 깨달았다, 이런 말들은 듣고 나서 모두 흘려 버려도 좋다.
무슨 일에 종사하든지 아무런 문제 없다.
호흡이든, 요가든, 백팔 배(百八拝)든, 간화선(看話禪)이든, 태극권이든, 단전호흡 태식법(胎息法)이든, 기도든, 자기 좋을대로 해라. 그도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인연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단지 깨우치고야 말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오직 本來面目에만 마음을 두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조만간 깨우쳐 大自由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내려 놓기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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