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돼지소풍과 너무나 흡사하다 본문
깨달음도 무상(無常)한가? 그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 하였으니(諸行無常).
깨달음이야 일어난 바가 없으니, 무상하다 아니다 따질 수가 없겠지만, 분명히 말해 깨달음의 체험(體驗)은 무상(無常)하다. 깨달음의 체험은 없었던 데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거의 체험을 수반하며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것은 마치 문을 열어준 하인의 옷차림이 그럴듯하여 그 사람을 주인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집착이 사라졌는지, 보이고 들리는 사물이 너무나 생생하여 정말 도인(道人)이 된 것 같았던 그 좋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인연들이 점점 약화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당황하고 실의(失意)에 빠진다. “아니, 깨달음도 무상한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라 착각했던 체험이 무상한 것이다.
어떠한 체험이 있었든, 우주가 무너지고 그것이 내 가슴에 밀려오든, 천신(天神)들이 한꺼번에 하강하여 나에게 절을 하든 말든 그런 것들은 무상(無常)하다.
그것들은 모두 마음이 만든 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무상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한여름 밤의 꿈으로 치부(置簿)하고 그대로 먼저 살던 곳으로 흘러가 버린다. 도로 아미타불인 것이다.
바로 그때가 깨어있어야 중요한 시기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되는 공부를 보임(保任)이라고 해도 좋다.
깨달음의 체험은 흘러가 버렸어도, 깨달음은 사라지지 않고,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것은 찾고 말고 할 것이 없었던 물건이었다.
그것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입산수도를 하거나 인도나 미얀마 숲속을 찾아 헤매야 할 그런 것이 아니었었다.
사람들은 체험이 있을 때 그것에 정신이 팔리느라고 체험하고 있는 당체를 놓친다.
돼지가 소풍을 가서 인원 점검을 해보니 누가 세어도 돼지 한 마리가 없는 그런 상태와 너무나 비슷하다.
누구를 빠뜨렸는가를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였는데 말이다.
그때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스승은 제자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려주고, 쉽지는 않지만 붙들고 있는 것을 놓게 해준다.
꿈과 환상(幻想)으로부터 깨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견성(見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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