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깨달은 자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의무가 있다 본문
"깨달은 자도 없고, 깨달을 대상도 없다."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이야기다.
정말 깨달은 자가 없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자는 누구인가?
또한, 깨달음 대상이 없다면, 피를 말리는 그 세월 동안 헛수고를 했단 말인가?
대개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인정받기를 원한다.
상대가 무슨 이야기인지를 몰라 눈만 껌벅껌벅하거나 주장에 대하여 치고 들어가면 표정이 변한다.
정말 깨달은 자도 없고, 깨달을 대상도 없다면, 그런 반응에 불편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깨달음의 경계를 말한 것이며, 앞의 <깨달은 자...>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깨달았다면, 자기 깨달음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은 자도 없고 깨달을 대상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해 보일지는 몰라도, 상당수의 사람은 그 말에 웃을 것이다.
깨달은 자가 어디에 따로 있으며, 깨달을 대상이 "여기 이것" 말고 따로 있었더란 말인가?
다들 깨달아서 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스스로 깨달은 바를 모르고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늘 추구함을 쉬지 못하고, 결핍으로 오는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
혹시라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그쳐 보자.
당신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당신처럼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은 자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의무가 있다. "깨달은 자도 없고 깨달을 대상도 없다"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오늘 "몸을 통한 깨달음"이라는 Youtube를 보았다.
"아! 세상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하여 한편으로 기쁘다. 단순함 가운데 깨달음이 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하나가 모두라고 생각하지 말자.
신비한 것만을 쫓으려 하지 말자. 내 스승만이 제일이라고도 생각지 말자.
세상은 넓고 배울 것도 다 못 배울 만큼 많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깨달은 자는 분명히 있다. 귀만 기울일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