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왜 보시금(布施金)을 내는가 본문
7월 29일 한겨레신문은 조계종 총무원이 최근 보시금이 많이 들어오는 대표적인 기도사찰인 관악산 연주암과 팔공산 선본사(갓바위)를 ‘총무원 직영’에서 해제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종단 안팎에서는 이들 사찰이 ‘권승(권세를 가진 승려)들의 사금고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는데 조계종 중앙종회는 “지난 24일 임시회를 열어 ‘연주암과 선본사의 직영사찰 지정 해제 및 특별분담사찰 지정 동의의 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27일 밝혔고, 이에 따라 총무원장이 주지를 맡고 ‘관리인’을 지정해 직접 운영해온 두 사찰은 각각 제2교구 본사 용주사와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관할로 바뀌게 됐다 한다.
불교(佛敎)는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초기 불교에는 보시금이 없었다고 한다. 승려는 돈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 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수행자도 밥은 먹어야 수행을 이을 수 있기 때문에 하루 한 번 오전 중에 밥만은 빌어먹었다. 그래서 비구(比丘)라는 말은 걸사(乞士) 즉 거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은 돈이 생기면 딴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나 역시 돈이 생기면 “어디 가서 맛난 음식을 먹을까?”, “옷이 낡았는데 바꾸어 볼까?”, “올해는 에어컨을 장만해볼까?” 하는 생각이 나니 말이다.
돈이 많이 생기면 사람들이 그 앞에 고개를 숙인다. 화려한 사찰, 웅장한 교회를 짓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요즈음 불교에 깨달은 대덕(大德)이 나오지 않는 이유, 그리고 기독교가 부패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시금을 내는 이유는 모두 사리사욕(私利私慾)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진정으로 수행자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 적은 돈이나마 내고 있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헌금을 많이 하면 천국에 더 가까워지고, 살아서는 사업이 번창하고, 죽어서는 극락(極樂)이 보장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혹시라도 우리가 보시금을 내는 것이 그들끼리 권력 다툼을 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우친다면 누가 많은 보시금을 내려고 할까? 그들은 이미 부자(富者)인데 말이다.
부처님의 유훈(遺訓)이 “자기 안의 불을 켜라(自燈明)”였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모시지 못하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논어(論語)에 나온다는 시(詩)가 생각난다.
飯疏食飮水(반소사음수)
曲肱而枕之(곡굉이침지)
樂亦在其中矣(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
於我如浮雲(어아여부운)
거친 밥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고
의롭지 않게 부귀를 누림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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