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나’라는 것 본문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에 속고 있다.
진정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 안다면 초등학생에게라도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치적으로 그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주제라 할지라도 그렇다.
‘나’라는 것.
태어난 이래 단 1분도 그것과 떨어져 살아 본적이 없고,
그것이 주체(主體)가 되어 말하고 행동하고,
그것과 함께 울고 웃었으며,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라는 자리에 바로 말하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다면
이건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나’를 설명하라고 하면 자명(自明)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첫째 원인은 그것에 대해 교육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 이유는 사느라 너무 바빠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생각해 보려 하였으나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연하여 그냥 덮어두었다.
그렇지 않은가?
더러는 쉽게 성직자로부터 얻어 들은 조물주의 창조물이라는 말을 신앙하기로 했거나,
과학시간에 배운 원숭이의 진화를 검증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의 의문이 풀렸을까? 그리고 그런 행동이 과연 지성인을 자처하는 우리의 태도일까?
수사관은 머리카락 하나, 발자국 하나를 근거로 범인을 찾아낸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숨쉬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실체덩어리가 여기 함께 있다.
당장이라도 파악해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 정체를 쉽게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그것을 만나기 위해 히말라야로 떠난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 있는 이것은 ‘내’가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세상에 ‘나’를 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것이 바로 나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며,
우리의 행복(幸福)과 불행(不幸) 모두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