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본문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고급의 선물일수록 여러겹의 포장이 있으며, 귀한 손님일수록 건물 뒤 내실(內室)로 안내되는 법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말 한마디에 담박 깨우쳐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견성(見性)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부의 모두라고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그것을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보다 쉽다'고들 하는데 체험해보면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냥 보면(just look) 바로 보여지는 것이 性이다. 그래서 돈오돈수(頓悟頓修)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늘 드러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기관(五感)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간장맛 짠 줄만 알면 견성이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애를 쓸 필요가 전혀 없다.
생각을 잠시 쉬고 그냥 보면(Don't think just look)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애를 쓰다보면 오히려 조우하기 더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부터이다. 깨달음은 공부의 결과물로 나중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견성이 먼저고 심층공부는 그 이후이다.
性을 보았다면 필히 命 공부로 진입하여야 한다. 명공부가 결여된 견성은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道를 닦는다는 말은 사실상 명 공부를 가리킨다. 그 핵심은 숨 속에 있으며 그것이 바로 생명에너지이다.
공부에 앞서 알아 두어야 할것은 명 공부는 견성처럼 담박되지 않으며, 정성을 다해 지속적(漸修)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命은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는다.
항심(恒心)을 가지고 정성들여 불리고(鍊), 두두리고(鍛), 녹여낼(煉) 때 비로소 그 진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명이다.
견성 이후 명 공부가 이어지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흔들림을 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할지라도 평생을 세속과 인연을 끊고 숲 속에 머물며 번뇌와 투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여진 것(見性) 만으로 만족해서는 퇴보를 피할 수 없다. 가고 가고 또 가야한다. 그래야 나머지 한쪽날개인 得命을 찾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여진 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달과 손가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대의식과 상대의식 (2) | 2018.02.26 |
---|---|
저절로 보인다 (0) | 2018.02.21 |
仁은 자연스런 德目 (0) | 2018.02.14 |
깨우침은 절실해야만 가능하다. (1) | 2017.08.30 |
타인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가? (3) | 2017.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