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없음이 있으면 있음도 있다 본문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교리(敎理)를 정립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이 '무아(無我)'이다.
당시 브라만교는 죽어도 죽지 않는 나, 즉 '아트만(atman)'을 중심교리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 종단(宗團)을 만들면서 기존 종단의 종지(宗旨)를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싯다르타가 자성(自性)이 실재(實在)함을 너무도 잘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無我라면, 무상(無常)도 헛소리가 되고, 고(苦)와 집착(執着)도 모두 꿈같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내가 없다면, 무상(無常)의 이치가 어찌 유용(有用)할 것이며, 나란 것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고통받고 누가 윤회(輪廻)를 할 것인가?
그의 무아설(無我說)이 한편으론 우리의 허망한 苦를 해결해 주는 좋은 실마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정말, "나"란 것은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살 밖에는 달리 별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 개시허망(皆是虛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없다"는 것은 필히 "있음"이 근거가 되어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無我는 自性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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