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참나 (5)
谷神不死
누구에게나 ‘참나’와 에고는 동거(同居)한다.하나가 다른 하나를 싫다고 내쫓을 수 없다. 새로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해서 먼저 살던 집에 불을 질러서는 안 된다.그것처럼 무책임한 일도 없다. 그리하면 그날부터 남의 집에서 잠을 자야 할 판이니 말이다. 입주(入住)하기 전까지는 살던 집에 살면서짬짬이 새로 산 아파트의 인테리어 공사를 해야 한다. 나는 칠 평생 ‘참나’로만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그런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無餘涅槃)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라.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이슬람이든, 우리 모두는 ‘참나’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그때까지는 ‘에고’를 화나게 하지 말고 잘 구슬리며 지내야 한다. ‘참나’와 에고는 동거(同居)하고 있으며,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에고가 하고 있..
불교의 핵심을 말하자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즉 무아(無我)이다. 그것이 싯다르타 깨달음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라문교(힌두교)는 유신론이다. 창조, 유지, 파괴를 담당하는 삼주신(Trimurty로서 Brahma, Vishunu, Shiva)을 신앙하며, 개체적 자아인 Atman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Brahman과 합해지는 것을 최종적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 신앙 체계를 뒤엎은 것이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 체계는 거의가 無我를 증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승(大乘)이 출현하며 힌두의 윤회까지 받아들이더니, 無我가 진아(眞我)라는 해괴한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부처의 가르침인 無我를 부정할 수는 없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
자기를 둘로 나누지 말라. 나라는 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에너지(氣)의 종합체이다. 그중 하나만 부실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참나'라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마치 토끼 뿔, 거북이 털을 찾는 것과 같다. '참나'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에고(ego)를 버려야 한다, 심지어 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다.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에고는 나 자신, 즉 자아(自我)이기 때문이다. '참나'라는 조작된 것에 속지 말고, 에고를 죽이려 하지 말라.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바로 에고이기 때문이다. '참나'와 '에고'는 둘이 아니다. 에고는 버리거나 죽일 대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에고(Superego)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기만 하면 되는..
깨달음이란 즉시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단지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입니다. 교리(敎理)가 아니며, 배우거나 믿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깨달음은 멀어집니다. 학문으로 덮으려 하기 때문에 내가 점점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리를 틀고 앉을 필요도 없고, 가족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을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바로 '나'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무아(無我)도 아니고, 참나(眞我)도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아(無我)니, 진아(眞我)니, 따지는 것부터 깨닫기 싫은 핑계입니다. 깨달음을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자기를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으며, 만났다..
(하루에 두 시간을 면벽(面壁) 수련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음은 그 사람과의 대화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벽 앞에 앉아 계신가요?’ ‘깨닫기 위해서지요.’ ‘그렇게 앉아있으면 벽에서 깨달음이 나오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렇게 하고 있노라면 깨닫게 된다고 믿습니다.’ ‘무슨 깨달음인가요?’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거지요.’ ‘(놀라며) 당신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나요?’ ‘아! 알긴 하지만 참나(眞我)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나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찾기 위해 이렇게 수련하고 있는 겁니다.’ ‘잃어버렸나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게 해드릴까요?’ ‘정말요?’ ‘여기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네에??’ ‘일단 눈은 뜨고 저를 보세요. 제가 보이나요?’ ‘네,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