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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근심 걱정이 없는 고요한 자리, 하루 중 얼마를 깨어서 그곳에 머무나요? 그 자리가 자성(自性) 자리입니다. 삶에 시달려도 우리는 그 자리가 있어서 살만한 겁니다. 그 자리에 한발을 걸친 사람은 돈이나 권력, 명예에 구애받지 않고 늘 당당할 수 있습니다. 丹田을 알면 바로 그 자리로 연결됩니다. 의수단전(意守丹田)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앉으나 서나 기운을 연단(鍊鍛) 하세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명상(冥想)이란 생각을 끄는 행위입니다. 생각을 멈춰야 의식의 방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편해지기 위한 목적만은 아닙니다. 신앙단체의 명상은 그들 식대로, 생각을 그들 좋은대로(비관적)으로 조정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사업(영업)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느 쪽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 것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특권입니다. 변속기 레버를 중립에 두어야 자동차 방향을 전진에서 후진으로 바꿀 수 있듯이 우리 생각을 바꾸려면 생각을 멈춰줘야 합니다. 자기를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비관적이 되게할지는 자기의 선택입니다. 자동차의 방향을 운전사 마음대로 바꾸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이고, 마음의 기능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내(존재)가 아닙니다. 생각을 쉬어야 실재(實在)가 드러납니다. 생각이 없어도 나는 존재합니다. 그것이 Fact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흔들리지 않는 견해(正見)가 생깁니다. 사고작용이 정리(正思)되므로, 이치에 맞춰 우왕좌왕하지 않는, 누가 들어도 끄덕일 만한 말(正語)을 하게 되고, 행동도 그에 따라(正業)하게 됩니다. 자기를 늘 살펴보십시오. 만약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면 공부가 좀 더 필요합니다. 단전(丹田)이 열리면 생각이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에너지(氣)의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에 여유가 생기고 당당해집니다. 에너지(氣)가 여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집니다. 신(神)과 기(氣)가 계합(契合)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단전(丹田)이 살아있고 소주천(小周天)이 된 사람과는 척을 지지 않는 것이 좋다. 丹田이 활성화 되었다는 것은 의식과 에너지(氣)가 계합(契合)되었다는 말이다. 丹田은 잡념을 무산시키고 고도의 집중력으로 염력을 일으킨다. 염력(Psychokinesis)은 모든 것을 이기는 순수의식의 힘이다. 丹田을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몸을 바로잡고(調身), 그리고 의식(意識)의 초점(調神)을 단전에 두고 호흡(調息)으로 불을 지펴야 한다. 일념(一念)을 가지고 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반년이면 丹田을 깨울 수 있고, 그 후 3년 정도면 단전을 살려 선계(仙界)에 입문(入門)할 수 있다. 얼마나 성심(誠心)으로 공부하느냐, 그리고 스승이 누구냐가 성패(成敗)를 가름한다. 인연(因緣)을 소중히 하고, 가고 가고 또 갈..

행복은 돈이 있고 없고, 권세가 있고 없고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고, 자기 길을 갈 줄 알아야 행복하다. 늘 긍정적이며 감사하는 생활이 행복을 준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근심 걱정이 없다. 근심 걱정이 문제해결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만족하는 지족(知足)의 삶이야말로 행복을 부르는 생활태도다. 나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무위(無爲)의 삶을 지향한다. 일종식(一種食)에, 잠들고 깨는 시간이 일정치 않지만 거의 불편은 없다. 각자 자기 길이 있겠지만 나는 선도(仙道)를 닦는다. 어연 40년에 최소한 문고리는 잡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만 하며 70객이 되었다. 이제는 글쓰고 가르치는 일이 소일꺼리다. 수행에 의지가 있는 언제든 ..

단전(丹田)이 열리면 에너지(氣)의 본원(本源)과 계합(契合)된다는 것 외에 생각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이 살아납니다. 수행자의 가장 큰 고민은 제어 안되는 잡념(妄想)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부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원흉입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丹田은 꼭 회복시켜야 합니다. 丹田이 힘을 얻으면 생각의 고삐를 쥘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려면 제일 관심사가 바뀌어야 합니다. 丹田에 제일의 비중을 두어 공부한다면 반년이면 가능한 것이 단전활성화입니다. 물론 공력(功力)을 가진 바른 스승에 귀의해서 공부해야겠지요.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자성(自性)은 무궁무진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알아차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가 모를 뿐 그것에겐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두를 이루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깨우쳐야 합니다. 수표를 단지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불쏘시게에 지나지 않습(無用)니다. 하지만 수표의 기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무엇이던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옵니다. 깨달음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느님(自性)을 알아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밥 담았던 그릇에 김치를 담았다가 비우고 다시 국을 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릇이 오렴되지도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설탕 만들던 회사가 라디오를 만들고 이제는 반도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가 없어졌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개었다, 흐렸다 해도 마음은 마음일 뿐입니다. 성인(聖人)이 그리 말했다고 해서 앵무새처럼 그를 따라 “내가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내가 없어지는 날이 올 때까지는 나는 나에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과연 언제 내가 없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든 성공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양신(養神) 공부는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구년면벽(九年面壁)으로 표현됩니다. 그 말은 불가(佛家)에서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조실(祖室)들은 요구합니다. “앉아있는 1시간 내내 딴생각은 하지 말고, 고요히(禪定) 벽만을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매우 훌륭하지만, 범인(凡人)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목숨을 걸만한 처절한 각오가 없다면 말입니다. 선도(仙道)의 의수단전(意守丹田)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쉽습니다. 하지만 먼저 통기(通氣)와 丹田 깨어남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단전공부는 불교 사념처(四念處) 공부의 종합편입니다. 丹田을 意守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풍경(身受心法)들을 봅니다. 仙道만의 기운이 모이고 흩어지는 액티브(active)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