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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실존(實存)은 본질(本質)에 우선한다." 기존의 철학을 입 다물게 한 사르트르의 말이다. 주기학(主氣學)이 주리학(主理學)에 대항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實學)이 허학(虛學)을 덮듯이... 어찌하여 實存은 本質에 우선하는가? 실존은 본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實存이란 무엇인가? 주체성을 가진 '지금 여기, 이 존재', 그것이 실존이다. 세상을 따라 살지 말고, 나를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실존주의다. 하지만 말만으로의 실존주의는 虛學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누군지, 자기 본질을 모르는 실존주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무아(無我)'란 있어 보이는 말인 듯 해도, 내가 없으면 먹을 수도, 잠잘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내가 없으면 알아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엄연히 실재(實在)하고 영원한 존재다. 고정되어 있지 못하다고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다. 몸과 마음은 나는 아니지만 그것들의 변화를 알고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는 놈이 있다. 그것이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자아(自我)이다.
수행을 위해서는 일단 잡념의 통제가 필요하며, 수행자는 인연 따라 각기 자기 기국(器局)에 맞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특정한 어휘(呪文과 챈팅)를 외운다거나, 일정한 동작(3000배, 수피댄스)을 반복, 그리고 호흡의 관(觀), 간화선(看話禪) 등 명상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 것들이다. 그중 어떤 것도 순수의식(Samadhi)으로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인간의 일체의 행위는 남김없이 깨달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수행의 의지가 있는 사람에 한하겠지만, 하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해인총림의 조실(祖室), 성철스님은 화두(話頭)가 여여(如如)한지에 중점을 두어, 오매일여(寤寐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주로 물었다고 한다. 법거량(法巨量)을 통해 가늠하는 전통을 버리고 말이다. 선도(仙道)..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철학을 한다는 모모의 서양 사람들이 무아(無我)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게 맛(?) 정도는 알고 그리 말하는지 안쓰러운 감이 든다. 無我의 삶이란, 최소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아(無我)를 주장하려면, 당연히 무아답게 삶의 모양이 소박해야 하고, 무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욕에 찌들고,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위선(僞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아'의 가정(假定)에서 실존(實存)이니, 진아(眞我)를 논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그렇다고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엉거주춤 살라는 말은 아니다. 관리하면서 사는 삶이 아름답다. 자연무위(自然無爲)를 그저 ..
우리는 실존(實存)한다. 우리는 변화하면서도 실존한다. 혹자는 "변화하는 것은 실존하지 못한다", "무엇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은 실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상호 세워 주면서도 존재를 유지하는 신비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實存이다.
사물을 인식(認識)할 때는 인식자와 인식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인식자가 있으므로 인식 대상이 있고, 인식 대상이 있으므로 인식자가 있는... 서로에게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그런 경우 무엇이 주재자(主宰者)일까요? 과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는 것은 존재할까요? 그래서 남방불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나는 없다"는 무아론(無我論)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없다고 해도 "나"란 것은 있지 않습니까? 이론상으론 없고, 모양은 분명치 않을지 몰라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나요? "나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놈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것은 이미 몸과 마음을 벗어나 있으나, 차원이 다르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을 지은 것이 "텅 비어 있기는 하지만 묘하게 있다"는 의미의 진공묘유(眞空妙有), 혹은 "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