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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나는 여기 이렇게 있다.잃어버리는 물건이 아니다.어제도 나는 있었고, 오늘도 나는 있으며, 내일도 나는 있을 것이다.돈과 권력(직업)을 잃어도, 명예가 사라져도, 나는 있다.이름이 내가 아니며, 내 일이, 내 사명(使命)이 나는 아니다.이 몸도, 마음도, 나는 아니다.나는 누구인가를 알려면 위에 열거한 모든 것을 제거해 보라."이것이 '나'일 거야"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말이다.그러면 당신은 즉시 '부처'가 된다.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사람을 부처라 한다니 말이다.어려운 일인가?

자의(自意)에 의해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수행자(修行者)이다. 최근 은둔형(隱遁形) 외톨이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들이 범죄의 주역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타력(他力)에 의해 그리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타의(他意)에 의해 은둔할 수 있을까?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히기 전에는 말이다. 잘못된 책임을 타인에게만 미루는 사람은 자기관조(自己觀照)를 못 하는 사람이다. 발전 역시 기대할 수 없다.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물론 수행자에 한하지만 ... 그 기회를 자기가 누군지를 알아채는 데 활용할 수 있다면 그는 재탄생할 것이다. 성인(聖人) 소리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일정 기간 은둔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기가 누..

기계(AI)는 자기가 누군지에 관심이 없다. 감정이 없고, 생각도 없으며, 의지력도 없다. 그저 입력된 대로 심어진 기능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만이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말 심각하게, 자기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정체성(正體性)은 본성(本性)으로 통하며, 그것을 아는 자를 불가(佛家)에선 '부처(Buddha)라고 한다. 지성인(知性人)이라는 말이 있다. 해석하면 "性을 아는 사람"이며, 여기에서 性이란 자기 本性을 가리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성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어영부영 살아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되기 위해선 관심의 초점을 그것에 맞춰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말은 무성하지만.. 자기를 아는 사람은 너무 희귀(稀貴)하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몸이 부실하거나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선 부족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운(氣運)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기운이 없어도 그것은 사람이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자기 마음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은 몸과 마음을 조정하는 사령관 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기운(氣運)도 '나'는 아니다. 그것들은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그것들 뒤에 그것들을 지켜보는 신령(神靈)한 물건이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을 챙기는 것을 수행이라 하고, 늘 그것과 함께하는 자를 가리켜 '깨달은 자' 혹은 '부처'라 한다. 그리고 기운까지 자유자재한 사람을 신선(神仙)이라 부..

마음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는 그것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가도, 변하면 그것 때문에 못 살겠다 하는 것이 마음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 마음 말고 진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심(本心), 혹은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마음을 찾아 챙겨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경계(境界)를 따라가지 말고,생각을 하고 있는 그놈을 주시(注視)하라!눈이 눈을 볼 수 없듯,생각을 하고있는 그놈은 생각이 아니다.이 몸과 이 마음도 '나'는 아니고,십팔계(十八界)도 '나'는 아니다. 그것은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고, 느낌도 없고,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지만, 만상(萬象)을 나타나게 한다.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것은 빛이요, 소리요, 에너지다.

닦아도, 지워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諸行無常), 언제나 여여(如如)한 것이 있다. 눈앞에 하느님과 부처가 나타나도, 시간 지나면 사라지지만, 오직 하나 항상(恒常)하는 것이 있다. 모양에 속지 말아야 한다. 보고 있는 그놈을 되비쳐 보라. 번뇌 망상을 없애려 하지 말라. 번뇌 망상이 없으면 그놈도 없다. 번뇌하고, 망상하는 그놈을 보라. 그놈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진리는 영원합니다. 그것은 부처가 만든 것도, 예수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2 × 2 = 4, 2 × 3 = 6입니다. 부처나 예수를 진리 앞에 두지 마십시오. 진리가 가려져 안 보일 수 있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이라(殺佛殺祖)'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물러섰을 때 진리는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받기 어려운 질문은, "하느님은 누가 창조했는가?"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이므로, '스스로 있는 분'이라고 하지만, 궁색하기 그지없는 답입니다. 조물주를 주장하는 한, 당연히 그를 만든 자도 있겠지요. '금강경'에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공표합니다. 그만이 가진 신통(神通)이 따로 있으며, 어떤 아라한보다 수승(殊勝)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점은 기독교의 주장과 불교는 거의 흡사합니다. 하나같이 신앙은 모순으로 버무린 비빔밥입니다. 교조(敎祖)는 어떠한 법(法)도 초월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혹 마당에 굴러다니는 주먹만한 돌이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모른다면...전쟁이 이미 끝났는데도 병사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혹시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란 것을 입으로만 외우고 있다면... 당신이 진정코 부처라는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면...세상에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당신은 하느님의 속성(屬性)을 지닌 그의 자녀(子女)이며,그 하느님의 속성을 다른 말로 부처(Buddha)라고 한다는 것을 혹시 아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