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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한국의 사찰을 방문한 티벳의 고위 승려(僧侶)에게 한국 불교(看話禪)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목표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에 티벳 승려는 밝은(놀란) 웃음을 지으면서 정말로 수승(秀昇)한 수행법이라는 찬사의 말을 했다고 한다. 잠시 후 티벳 승려는 "그런데 여기 있는 스님들 가운데 몇 분이 깨달음을 얻었느냐"고 물었는데, 그곳에는 고개를 들고 상대를 직시하는 중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전언(傳言)이 있다. 문제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깨달음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놓는 것이 순서다.그것을 뒤로 미루고 깨달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망발이다. 깨달음에 대해서는 각자가 구구한 사견을 가지고 있겠으나,불교(佛敎)를 이야기하는 자리인 만큼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중심이 되어야 하므로,고(苦), 즉..

나는 누군가가 자성(自性)을 보았다고 자랑할 때 일단 인정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언행(言行)을 보아가며 다시 하나 하나 질문해 들어간다. 그러면 그 사람이 처음에 일별(一瞥) 했을 때와 다른 현재의 상태를 알 수가 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말하지만, 공부가 담박 끝나는 것으로 나는 보지 않는다. 신통방통한 말을 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질문을 이어가면 감정통제를 못하는 것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끝나도 끝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수행에 적용하면 그대로 들어맞는다. 수행이야말로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가고, 가고, 또 가지 않는다면, 확철대오(廓澈大悟)는 멀다. 늘 자기관..
자아(自我), 즉 본성(本性)을 확인하는 것이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만나고 보면 그 말이 헛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생각들을 내려놓고 고요히 지켜보노라면, 우리(識)가 하는 짓을 담담(淡淡)하게 지켜보는 무언가가 있다. 무어라고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신묘(神妙)한 물건인데, 그것이 본성이며, 그것을 확인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이제 우리는 정보공유의 시대, 비밀이 없는 세상에 살게 되어 모든 것들이 알기 쉽게 풀이되어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되고 있다. 아울러 뒤로 미루어왔던 실존(實存)에 대한 관심 역시 일반화되는 시절을 맞았다. 아마도 몇 년이 지나 인공지능(人工知能)이 일반화되는 시점 즈음이 되면 견성이 거의 상식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기존의 사고..
주리(主理)는 이(理), 즉 이치(理致)와 법칙(法則)이 세상을 이끈다는 주장(主張)이며, 주기(主氣)는 이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세상(世上)을 이끄는 것은 이(理)가 아니라 기(氣)라는 주장이다. 주리파(主理派)는 이발기수(理發氣隨; 理가 먼저고 氣는 뒤를 따른다)라는 말로 主理를 설명하며, 주기파(主氣派)는 기발이수(氣發理乘; 氣의 작용에 理는 단지 동행한다)로 主氣를 표현한다. 당시 主理와 主氣의 대립은 사회 전반적인 현상이었으며, 수행인들 역시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엔 主理(朱熹, 退溪)가 주도하였으나, 개화(開化)가 이루어질수록 主氣(奇大升, 栗谷, 丁若鏞)의 실학(實學)에게 사실상 우위(優位)자리를 넘겼는데 작금(昨今) 역시 세계적 세태를 보면 수행세계(修..